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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3. (金曜日) “시작始作”

2022.12.23. (金曜日) “시작始作”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짓날의 기운이 공부방 창문을 통해 나를 방문한다. 창문 밖 높다란 잣나무들 며칠 전 내린 눈이 가지 위에 주렁주렁 매달리더니 이제는 얼어붙었다. 눈으로 무장한 전나무는 이젠 겨울바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오늘 아침 기온은 어제보다 더 떨어져 영하 16도다. 일년중 가장 추운 날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절호의 기회機會다. 그 기회는 우연을 가장하고 우리를 끝이 없는 바닥으로 끌어내지는 일상의 지겨움이지만, 동시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반격反擊의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동지冬至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이른 아침 의례儀禮를 회복하는 기회로 포착하고 싶다. 일년중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지는 일년중 가장 낮이 길다는 하지夏至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동지는 하지이고 하지는 동지다.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삶이며, 아침은 밤이고 밤은 아침이다. 우주의 주인인 시간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구분한 절기를 초월한다.

그런 절대적인 인간을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는 ’호 데 카이로스 옥쉬스‘ὁ δὲ καιρὸς ὀξύς라고 말했다. 이문장을 로마의 서정시인 호라티우스는 ’오카시오 프라이쳅스‘ occāsiō praeceps 즉 ’기회는 금방 달아난다‘라고 번역한다. 기회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단련한 사람의 몫이다. 더욱이 동지는, 더 이상 밤이 길어질 수 없는 단단한 바닥으로 이젠 낮의 길이가 길어질 수 밖에 없는 희망의 시작이다.

나는 오랜만에, 좌정과 고요를 간절하게 원하는 내 몸과 영혼을 위해, 하얀 방석에 내 몸을 올렸다. 마치 바락이라는 천상의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내려다본 무함마드처럼, 경이로운 감정에 휩쌓였다. 아니 그 환희는 무함마드가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내려왔을 때보다, 감동적이다. 나는 이 방석에 앉아, 내가 있어야 할 유일한 장소인, 심연 깊은 곳에 내려가,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나 자유자제로 갈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예쁜이, 벨라, 그리고 샤갈이 내 옆에 다가와 서 있다. 내 좌정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침묵을 유지한 채, 꼬리를 천천히 흔든다. 그렇지만 여섯 개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며 말한다. “산에 올라가요. 오늘이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에요. 산에는 희망과 신비가 숨어있어요.” 우리는 뒷마당에 이어진 눈이 수북하게 쌓인 야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털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귀가 얼어붙고 호흡할 때마다 입에서 나온 숨이 금방 얼어붙는다.

요즘 이 야산은 고라니 세 식구가 집이다. 이들은 산 중턱에서 잠을 잔다. 나는 이들이 잠을 잔 자리를 발견한다. 그곳에만 둥그렇게 눈이 쌓이지 않고 낙엽과 나뭇가지만 드러나 있다. 이들은 밤에 기상천외한 소리로 자신들이 이 곳의 주인이라고 노래를 부른다. 우리가 낙엽과 솔잎 위에 쌓인 눈을 헤치며 올라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저 야산 중턱에서 고라니 세 마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 깜짝할 사이에 산 등선으로 도망친다. 우리를 힐끗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산등선과 이어진 비탈진 등선을 따라 사라진다. 오른손으로 샤갈과 벨라 가슴에 찬 줄을 잡고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샤갈은 벌써 고라니가 밤새 남긴 흔적을 따라 온몸을 흔들며 언덕에 오르기 시작한다. 벨라는 항상 의견을 달리한다. 샤갈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몸을 틀고 나를 빤히 응시한다. 내가 자기 의견을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가여운 눈이다.

우리는 고라니가 야산에 만들어 놓은 좁다란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칫 잘못하면, 제법 가파른 언덕에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지지 십상이다. 한참 산에 오르면 잠시 숨을 고르는 휴식공간이 나온다. 우리가 정해놓은 정상에서 숨을 고르며 눈이 수북이 쌓인 나무 앞에 다시 좌정하였다.

반려견들은 잣나무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청설모를 바라본다. 회색털로 온몸을 덮고 귀에 털뭉치가 난 청설모가 나무를 솜씨 있게 탄다. 나는 나무를 응시한다. 이 무명의 나무는 차가운 눈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눈을 견뎌야 따스한 봄이 오기 때문이다. 추위는 이 나무를 정화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도움이다. 동지는 하지의 시작이다. 동지는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나만의 별을 발견하게 도와주는 캄캄한 밤이다.

사진

<눈으로 덮인 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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