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木曜日) “산책散策”
2022년의 마지막 달 12월이 시작되었다. 이젠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코로나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이태원 참사의 심각성이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 고약한 암세포로 변해 우리의 고질병인 망각 속에 숨어버렸다. 그런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온 국민이 베옷을 입고 그 이유를 찾아보는 자기-응시와 자기-참회가 없다면, 언젠가 더 큰 비극으로 찾아올 것이다. 악은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다시 찾아오고야 마는 불청객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악어눈물을 흘렸지만, 지금은 머나먼 과거 이야기다. 미디어를 통해 625와 같은 참상을 전해 듣지만, 코로나시대 연명하시도 바쁜데, 그런 소식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하라리나 도킨스 말대로, 인간이 이타심이나 동정은, 자신이 언젠가 혜택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투자하는 적금일 뿐이다.
이보다 더 끔찍한 비극은 대한민국 정치와 그것을 하루 종일 쉴새 없이 송출하는 미디어다. 한국 정치와 미디어는 삼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그 등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은 않는 사람들이 나와 뭐라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동네 우리에 갇혀 있는 소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고 감동적이다.
12월 1일, 동지冬至가 아직도 먼데 춥다.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1도로 떨어졌다. 장갑을 껴도 손가락 끝에 추위에 얼얼하고 털모자를 써도 찬 바람으로 귀가 시리고 뺨은 바싹바싹 마른다. 요즘 내 삶에 대한 불만은 무엇보다도, 수 년동안 의례로 행해온 매일 묵상 일기 쓰기의 중단이다. 지난 8월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져 하루 일과들 가운데, 최우선순위에 있었던 매일 묵상 글쓰기가 밀렸다. 마음을 여간하게 동여매지 않는 한, 글쓰기에 다시 불을 붙이기가 힘들다.
내 일생을 통해 가장 큰 선물은, 가족이외에 ‘매일묵상일기每日默想日記’였다. 일기는 하루를 그나마 실수를 덜 하게 만든 장치였다. 그 의례가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내 삶의 질도 점점 누추해졌다. 마음이 느슨해지니, 허접한 생각과 일들이 일상을 침투하여, 하루를 온전히 살지 못하고 그렇저럭 연명하게 되었다. 지난 석 달간 오랫동안 하루의 최우선순위였던 글쓰기가 왜 후 순위로 밀려 가까스로 얻는 거룩한 습관이 저만큼 도망가는 것을 방치한 나의 어리석음에 가슴이 아프다.
심기일전하여, 매일묵상을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뭔가를 새로 시작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반려견들과의 아침 산책코스의 변경이다. 지난 3개월 동안 우리는 자동차로 6km를 이동하여 산과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10분동안 동안, 새벽 묵상을 통해 결심한 의지가 느슨해져, 산책에서 별로 영감을 얻지 못했다. 산, 나무, 강, 풀, 야생동물을 구경거리고 보기 시작하여, 이전에 그들이 나에게 선물해 순 시선視線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끊어졌다. 자연이 언제나 준비하여 나에게 주려는 영감이 내 공감 능력의 희미해졌다.
오늘부터 산책 경로를 바꿨다. 소로가 말한대로 산책은 나에게 성전聖戰이다. 익숙한 공간을 넘어서,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오늘의 나를 담금질하는 전쟁이다. 우리는 집 뒷마당과 연결된 가파른 야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고라니와 야생동물들이 지나다니는 경계의 땅이다. 해발 100m정도 되는 산으로 곳곳에 에머럴드색을 띤 크고작은 바위들이 수놓아져 있는 미지의 땅이다. 겨울이 되어 저 산 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오던 시냇물이 멈췄다. 냇가 곁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한창 올라가면,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미끄러지기 일쑤인 바위 언덕이 나온다.
겨울 숲은 침묵沈默이다. 해묵은 낙엽과 밤송이와 솔잎으로 가득 찼다. 족히 30m이상되는 전나무와 소나무가 산비탈을 빼곡이 수 놓았다. 산책은 종교, 언어, 철학, 경치, 알레고리를 알려주는 심장 소리다. 나, 샤갈, 벨라, 그리고 예쁜이가 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야산은 급경사라 등산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한참 오르는데, 커다란 고라니가 깜짝 놀라 우리를 바라본다. 자기 놀이터에 침입한 불청객들을 보고 기분이 상해 달아난다. 아마도 샤걀의 등치를 보고 본능적으로 도망가야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친구는 껑충껑충 뛰어오르더니 이내 언덕을 넘어갔다. 샤갈과 벨라는 내가 잡고 있는 리드줄을 당기며 계속 짖는다. 개줄이 풀어진 예쁜이가 고라니를 따라잡으려고 뒤따라 가보지만, 이내 지쳐 다시 돌아 온다.
우리는 전나무와 소나무로 빽빽이 들어서 있는 숲 한가운데 앉았다. 바닥은 온통 나뭇가지와 솔잎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가만히 야산 중턱에 앉아, 거룩한 습관이 달아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먼저 나는 일일일행一日一行이라는 원칙을 무시했다. 하루가 인생이라고 여기고, 새벽에 눈을 뜨면,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기도 하루를 시작했는데, 하루의 도래를 배은망덕하게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른 아침 묵상과 명상록 읽기가 진행되지 않아, 그 다음에 진행하는 산책도 성전이 아닌 방랑이 되었다.
잠은 하루를 가르는 문으로, 신은 생각하는 인간에게 하루를 선물로 준다. 로마정치가이자 스토아철학자인 세네카는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를 <도덕적인 편지> 제101편 8단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매일)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했다고 여기면서 우리 마음을 가지런히 정렬시키자. 그 어떤 것도 미루지 말자nihil differamus.” 하루를 인생의 첫날로 맞이하여, 해야할 일을 찾아 몰입하면, 그 하루가 일년이 되고 일생이 된다.
또한, 내 삶에서 ‘미루기’가 언젠지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잡았다. 미루기는 그 순간, 그 날에 해야 할 일을 정하지 않아 완성할 수 없거나, 완수하려고 최선을 경주하지 않아, 막연히 ‘내일 하자’는 달콤함 유혹에 넘어가는 의지박약이다. ‘미루기’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프로그래스티내이션’procrastination은 ‘내일’을 의미하는 ‘크라스’crās와 ‘-을 위하려’라는 전치사 ‘프로pro’의 합성어다. 미루기는 신이 주신 오늘이란 구별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흘려보내는 게으름이다.
언덕 중턱에 가만히 앉았다. 예민한 벨라는 내 뒤에 서 있고 샤갈과 예쁜이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집중하고 있다. 나도 이들과 함께 눈을 감았다. 매일묵상일기를 다시 쓰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미국 시인 웬델 베리가 ‘야생들이 마련해주는 평화’라는 시로 마음을 다져본다.
The Peace of Wild Things
Wendell Berry (1934-)
거친 것들이 선사하는 평화
When despair for the world grows in me
and I wake in the night at the least sound
in fear of what my life and my children’s lives may be,
I go and lie down where the wood drake
rests in his beauty on the water, and the great heron feeds.
I come into the peace of wild things
who do not tax their lives with forethought
of grief. I come into the presence of still water.
And I feel above me the day-blind stars
waiting with their light. For a time
I rest in the grace of the world, and am free.
세상에 대한 실망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한밤에 조그만 소리에도 깨어나
내 삶과 내 자식들의 삶이 어떻게 될찌 두려워할 때,
오리와 커다란 왜가리가 평화롭게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
노니는 물가로 가서 눕는다.
나는 야생들이 마련해주는 평화로 들어간다.
그들은 슬픔을 미리 걱정하며 자신의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고요한 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 위로 낮을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빛을 발산하기 위해 기다리는 별들을 느낀다. 잠시나마
세상이 가져다주는 은총 안에서 쉰다. 나는 자유롭다.
사진
<언덕 아래를 바라보는 샤갈과 예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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