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9. (日曜日) “산파產婆”

2022.10,9. (日曜日) “산파產婆”

<욥기>는 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비극작품으로 다른 비극에 비해 웅장하고 신비하며,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 비극悲劇처럼, 영웅이 오만해서 치명적인 운명을 맞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테의 <신곡>처럼, 자신의 죄를 걷어내, 천국으로 가는 희극喜劇도 아니다. <욥기>는 미지未知로 가득한 우주, 자연, 세상과 용감하게 마주하고, 내가 모른 것을 질문하고 또 질문하라고 촉구한다. 이 질문 끝에는 해답이 등장하지 않고 그 질문을 거두기 위해, 손을 입에 가져가는 침묵沈默만 남는다.

아, 누가 이 웅장한 비극작품을 생각해냈는가? <욥기>는 기원전 6세기까지 면면히 흘러와 히브리민족을 통해 아브라함 종교를 만든 전통 신앙의 근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의심한다. 신이 창조한 가장 숭고한 작품인 ‘욥’이라는 온전하고 정직한 인간이 자신이 생각하는 신과 세상, 그리고 신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얻는 혜안을 감동적인 시로 노래한다. 욥은 신과 자연의 섭리를 마주하며, 자신이 얼마나 작은 가를 발견한다. 신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가 얼마나 다른가! 히브리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적인 이미지와 어휘를 이용하여, 당시 어떤 인간도 표현하지 못한 우주, 자연, 신, 인간,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핵심을 묘사한다.

<욥기>는 히브리 문자文字 하나 하나 통해, 그 글자와 글자 사이 공간空間을 통해 우리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 미로迷路 끝에 숨겨진 불쏘시개 존재를 알려준다. 이것은 신적인 불꽃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다. 스위스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정의한 신인 ‘누멘’numem의 세 가지 특징인 미스테리움mysterium, 트러멘둠tremendum, 파시난스fascinans를 독자의 마음속에서 불러 일으킨다. 미스테리움이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비가시적인 진리이며, 트러멘둠이란, 이 세계를 발견했을 때, 밀려오는 공포이자 환희다. 그러면 나는 그 불꽃에 매혹되어, 빛이 인도하는 구별된 여정을 떠날 용기를 얻게 된다.

영국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Carlyle Thomas(1795-1881)은 <욥기>를 ‘펜으로 기록된 가장 웅장한 것들중 하나One of the grandest things ever written with pen’라고 평가하였다. 그가 고전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지만, 성서 66권의 책중, 단연 <욥기>가 최고라고 여겼다. <욥기>는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와 어깨를 겨누는 히브리 지혜문학 작품의 백미다.

덴마크 신학자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의 선구자 키르케고르(1813-1855)는 <반복Repetition>이란 책에서 <욥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욥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내 삶의 의미를 묘사하지도 뉘앙스를 감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욥을 다른 책처럼 눈으로 읽지 않는다.

나는 욥을 심장으로 읽는다.

내가 심장으로 읽을 때, 모두 구절을 다양한 방법으로 그 핵심을 투시한다.

어린아이가 베개 아래에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두고,

아침에 일어날 때, 그 내용을 잊지 않으려는 심정과 같다.

마찬가지로 나는 <욥기>를 침대로 가져간다.

그가 말하는 모든 단어는 내 병들은 영혼을 치유하는 음식이며 기쁨이다.

자, 한 단어가 나를 무기력에서 일깨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동요로 깨어난다.

자. 욥은 내 안에 있는 무질없는 분노를 잠잠하게 만들며, 열정으로 생긴 메스꺼움을 끝장낸다.

당신은 <욥기>를 읽었습니까? 욥을 읽으십시오. 욥을 여러번 읽고 또 읽으십시오.”

욥기는 산파문헌產婆文獻이다. 그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와 일대일로 마주하고, 자신이 지닌 편견을, 태양으로 가다간 이카루스의 밀랍날개처럼, 흘러내리게 만든다. 결국 남는 것은, 나만의 해석이다. 그 해석만이 옳다. 자신만의 아이를 배태하고 싶은 내가 분만실에 누워있다. 욥이란 산파가 나의 손을 잡고 인도할 것이다. 읽고 또 읽어, 내 삶에 신비神祕, 전율戰慄, 그리고 매혹魅惑을 회복하고 싶다.

사진

키르케고르(1813-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