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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5.(水曜日) “노동勞動”

나에게 ‘매일묵상’쓰기는 노동이다. 조금만 주저하고나 게으름을 피우면,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그 후엔 내가 정한 ‘거룩한 노동’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8월 초, 새롭게 삶을 시작한다고 작정한 후에, 바로 사탄이 등장하였다. 그는 이제 그만 써도 된다 나에게 속삭였다. 그때 마침 시작한 아슈탕가 요가 수련이 나에게 매일 4시간을 요구하였다. 오전에 매일묵상을 쓰던 습관이 요가수련으로 대치되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3년동안 삶의 최우선순위였던 ‘매일묵상’ 글쓰기가 2순위로 밀렸다. 2순위는 준수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꼴찌다. 매일요가를 수련한 지 두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버겁다. 그렇다고 어렵게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로 만든 이 글쓰기를 놓칠 수는 없어, 힘겨운 만회挽回를 시도하고 있다.

매일 묵상은, 새벽묵상, 반려견들과의 아침산책, 그리고 집안과 마당청소가 가져다 주는 신의 선물이다. 이제는 오전 10시, 요가 수련장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 모든 일과를 소화해야 한다. 묵상일기가 책상에 앉아 이런 책 저런 책을 보다 떠오른 망상에 대한 끄적임이 아니다. 신체, 정신 그리고 집중을 요구하는 전폭적인 노동이다. 이 노동은, 오늘 새벽 하루를 선물해 준 신에 대한 나의 의례儀禮이자 예배禮拜다.

‘노동勞動’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단어의 의미를 고전 히브리어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창세기> 2장 4절 후반부터 등장하는 ‘창조이야기’는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무명의 유대 저자의 작품이다. 이 이야기에는 <창세기> 1장과는 달리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무명 저자의 관심은 저 너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녀는 신을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신명, 즉 ‘엘로힘‘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녀는 신을 ‘야훼 엘로힘’ 즉 ‘주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인간이 거주하고 있는 안개가 자옥하게 올라오는 땅을 묘사하고, ‘야훼 엘로힘’이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만들고 자신의 영을 코에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했다고 고백한다.

야훼 엘로힘이 가장 먼저 만든 창조물은 농부가 땀을 흘려 일하는 밭이다. <창세기> 2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וַיִּטַּ֞ע יְהוָ֧ה אֱלֹהִ֛ים גַּן־בְּעֵ֖דֶן מִקֶּ֑דֶם וַיָּ֣שֶׂם שָׁ֔ם אֶת־הָֽאָדָ֖ם אֲשֶׁ֥ר יָצָֽר׃

(와이따 야훼 엘로힘 간-버-에덴 미-케뎀 와-야셈 샴 에쓰-하-아담 아쉘 야짜르)

“야훼 엘로힘은 동쪽에 (혹은 아주 오래전에) 에덴이라는 평원에 밭을 일구셨다.

그는 자신이 흙으로 손수 만드신 인간을 거기에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두셨다.”

그녀에게 야훼 엘로힘, 즉 신은 원래 농부였다. 신은 아주오래전에 구별된 공간인 ‘에덴’이란 공간에 ‘밭’을 일궈 놓셨다. 히브리어 ‘간’gan은 원-셈어Proto-Semitic 어근 *jinn-에서 유래했다. ‘진’은 버려진 땅에서 일정한 구획을 정한 공간인 ‘에덴’에 눈물과 땀을 흘려 일군 ‘밭’ 혹은 ‘정원’이란 의미다. 이 단어는 후대 고전 아랍어에서는 여성형 어미가 접미하여 ‘잔나툰’jannātun(جناتون)이 되었다. 아랍어에서 ‘잔나툰’은 천국이란 의미다. 무슬림들도 오래전에 밭이 천국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신은 자신이 흙으로 손수 창조한 인간을 이 밭에 둔다. 우리는 인간이 창조된 원래 목적을 밭에서 찾을 수 있다. 2장 8절 후반에 등장하는 히브리어 동사 ‘삼śām’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동사의 첫 번째 자음은 ś는 셈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s발음으로 소위 ‘설측마찰음’lateral fricative다. 혀를 입천장에 대고 입김을 밖으로 낼 때, 혀 양측에서 새어 나오는 ‘스’ 발음이다. 하여튼, ‘삼’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운명적으로 결정된 사건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신은 그곳에 영생을 보장하는 열매가 달린 ‘생명나무’와 우주의 지식과 그 깨달음의 열매가 달린 ‘모둔 지식’의 나무, 그리고 인간문명과 문화를 일구는데 필요한 네 강을 만든다. 그런 후, 신은 인간을 구별된 공간인 에덴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노동하게 하셨다. 다음은 <창세기> 2장 15절이다:

וַיִּקַּ֛ח יְהוָ֥ה אֱלֹהִ֖ים אֶת־הָֽאָדָ֑ם וַיַּנִּחֵ֣הוּ בְגַן־עֵ֔דֶן לְעָבְדָ֖הּ וּלְשָׁמְרָֽהּ׃

(와이카흐 야훼 엘로힘 에쓰-하-아담 와-얀니혜후 버-간-에덴 러-아버다흐 울-샤머라흐)

“야훼 엘로힘은 그 사람을 데리고 구별된 공간에 마련한 밭에 두셨다.

그 이유는 사람이 그 밭에서 노동하고, 그 밭을 원래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신은 인간이 주어진 땅, 즉 밭을 준 이유를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아바드’, 둘째 ‘샤마르’다. 첫 번째 히브리어 동사인 ‘아바드’는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아바드’는 ‘노동하다’이면서 동시에 ‘신에게 예배하다’라는 뜻이다. 손과 발, 그리고 몸을 이용하여 애쓰는 노동, 즉 밭일이자 농사일은 곧 신에 대한 예배이자 의례다. 노동이 예배이며 예배는 노동이어야한다. 둘째 ‘샤마르’에는 ‘신이 주신 자연을 원래의 상태로 보존하다’라는 의미다. 자연은, 인간이 훼손하지 않는 한, 무한하게 농작물을 매년 소출하는 기적이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환경보호’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한 노동이 있다. 그 노동은, 고상한 정신적인 활동이나 영적인 사치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에 대한 최선이자 예배다. 나는 나의 노동을 하찮게 여기는가? 아니면 정색을 하고 옷깃을 여미는 신에 대한 예배로 수행하는가?

사진

<가평 연인산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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