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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0. (日曜日) “이피게니아Iphgenia”

2022.10.30. (日曜日) “이피게니아Iphgenia”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이 생시인가 악몽인가?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단테 <인페르노>의 읽었던 끔찍한 장면이 TV화면을 통해 내 눈과 귀를 통해 내 슬픈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 장소가 식인종들이 득실거리는 야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 서울에서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용산구다. 용산구에서도 세계인들이 한국에 오면 항상 들려보는 다양성의 상징인 이태원에서 우리의 딸들과 아들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경찰이 투입되었어도, 오겹, 육겹으로 쌓여 신음하면 죽어가고 있는 그들을 몸 더미에서 꺼낼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이 정녕 실화인가!

이 장면은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니다. 비극은, 영웅들이 자신의 오만하여 자신의 몰락을 자초하는 이야기이고 희극은 보통사람이 불행을 시작하고 역경을 이겨 해피엔드로 마치기 때문이다.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事故이 아니라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이유를 만든 주동자가 존재하는 참사慘死다. 어제 이태원 해밀턴 호텔 비탈길에서 일어난 참사는 우리가 지닌 어휘로는 형용할 수 없고, 우리가 가진 상상으로도 감히 담을 수 없는, 심지어는 불가능을 초월하는 망연자실茫然自失이다.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가 살아온다고 할지라도, 이 참사를 글로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망연자실을 표현할 단어는 구약성서 <애가>에 등장하는 첫 단어 ‘에이카’אֵיכָ֣ה 즉 “어떻게 이런 일이!”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젊은이들은, 내 딸이고 아들이다. 운이 좋아,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지 않았기에, 지금 살아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가? 생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끊어질 수가 있는가? 저 들판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잡초雜草라 할지라도 비바람과 눈보라를 굳건히 견디고 사시사철 시의적절하게 변화하고 변모하고, 죽었다 살아나는데, 저 고위한 생명들은 저렇게 영영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짓날은 동시에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희망의 날이다. 그 실오라기와 같은 빛줄기를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기 위해, 스스로를 귀신으로 변장하여, 악귀를 쫓는 의식을 행하려는 축제인 할로윈이 서울 한 복판에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 되었다. 우리 자녀들은, 역설적으로 친구와의 간격間隔을 유지할 수 없어, 너무 촘촘히 밀착되어 숨을 쉴 수가 없어, 생명의 숨길이 달아난 것이다. 이들은 누군가 유토피아라고 주장하여 허상으로 존재하는 목표를 향해 전진前陣이 최선이라고 세뇌당한 희생자犧牲者다. 나와 어른들, 그리고 우리가 창작한 디스토피아라는 제단에 올려진 어린양들이다. 그들은 이피게니아Iphgenia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인 오늘날 트로이를 점령하기로 작정했다. 그의 동생 메넬라오스는 자신이 아내 헬렌이 납치되어 참전하였지만, 아가멤논은 그 목적이 달랐다. 그가 트로이를 함락시키면 지중해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군주가 되면, 최강 국가가 되면 무엇이 좋은가? 그가 트로이로 보이오티아에 있는 아올리스 항구에서 출정하려고 할 때,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행한다.

아르테미스가 화난 이유는 여럿이다. 최초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아가멤논>에 의하면, 아르테미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할 젊은이들을 위해 화가 났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엘렉트라>에서 다른 이유를 언급한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질 동물을 살해한 후, 자신이 사냥에 있어서 아르테미스 여신과 견줄 만하다고 자랑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아르테미스의 저주로, 그리스 군인들 사이에 역병이 돌고 바람이 불지 않아 이들을 실은 배가 출정할 수 없었다. 예언자 캘커스Calchas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아가메논는 자신의 욕심과 오만을 위해, 자신의 피붙이를 지중해 바다에 희생제물로 바칠 정도로 잔인하다. 그의 아내 클뤼템네스트라의 간곡한 부탁에 불구하고, 겁에 질린 이피게니아를 희생시킨다. 자신이 트로이를 정복하여 부를 축적하고 명성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치명적인 실수다. 그는 20년 후,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날, 클뤼템네스트라가 깔아놓은 붉은 카페프를 밟고 궁궐로 들어가, 잠복한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아가멤논의 비극은, 자신의 야욕을 위해 이피게니아를 무고하고 매정하게 희생시킨 행위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경제 대국이라고 자랑하고 한국문화가 세계를 장악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각자가 가진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문화와 공간을 제공받지 못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훈련을 시켜왔다. 돈을 잘 버는 기업에 들어가, 대량공정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설정해 주었다. 그리고 세계에 알려진 우리의 문화란, 대중의 표피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군무하는 로봇 생산이다.

자연의 모든 동식물들이 그렇듯이, 그 각자는 자신의 개성을 스스로 찾고, 나름대로 발휘하기 위해 ‘간격’이 필요하다. 그 간격은 개체가 외로움을 견뎌 고독으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개성을 지니는 존재가 될 때 행복하다. 이들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숨쉴 수 있는 간격이 필요하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왜 자신의 숨이 끊어지는 지도 모르게, ‘떠밀려’ 죽어간 우리의 자식들인 이피게니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사진

<아가멤논의 두 종이 이피게니아를 제단으로 가져가고 클뤼템네스트라는 애도한다>

벽화, 140cm x 138cm, 폼페이에서 발굴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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