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코메티 작품 ‘고양이’>
사진작가 파올로 몬티 (1908-1982)
1962, 베네치아 비에날레 opere Giacometti
Biblioteca Europea di Informazione e Cultura
2022.1.6. (木曜日) “창조ברא(바라)”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는 137억년전에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났다고 추정하지만, 그 과학적인 사실도 기껏해야 신화다. 인간이 지성이 높아지면, ‘빅뱅’이란 과학적 사실도 거짓이거나 잠정적인 사실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기원은,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풀리는 실마리다. <창세기>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심이 있던 시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대부분 인간들을 입에 풀칠하느라, 이런 생각은 사치라고 폄하한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다. 이런 상상력인 단명하는 ㅇ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예술이란 사실을!
<창세기>는 위대한 문학작품이다. 우리는 그런 작품을 ‘경전經典‘이라 부른다. 일정한 기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베스트셀러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인간들이 의지해야할 가치를 전달해주는 작품은 고전古典이다. 경전은 고전 중에 고전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깊이 읽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녀의 언행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져, 삶의 등불이자 생명수가 되는 작품이다.
<창세기>는 고전 중에 고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창세기>는 적어도 600년이상 구전과 문전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이 기원전 400년경 최종 편집되어 지금 형태로 고정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분으로 나뉜다. <창세기> 1-11장, 우주와 세상의 기원, <창세기> 12-50장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야기다.
내가 올해 지필하기 시작한 부분은 <창세기> 1-11장이다. 우주와 세상의 기원에 관한 내용이다. 이 부분은 인류가 처음으로 천체, 자연, 그들 안에 존재하는 힘, 그리고 그들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의 처음을 다루고 있다. 특히 초기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정성스런 서사시로 남겼다.
<창세기>에는 2개의 창조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는 <창세기> 1.1-2.4a와 다른 하나는 <창세기> 2.4b-2.25다. 전자(<창세기> 1.1-2.4a)는 기원전 6세기, 나라를 잃은 유대 사제가,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인간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었지만, 전지전능한 신으로 묘사하였다. 후자(<창세기> 2.4b-2.25)는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이 나라를 건국하고 태평성대를 누릴 때 기록되었다. 그 신은 인간의 삶에 직접 관여하는 다정다감한 신이다.
이 두 이야기는 신명, 어투, 배경이 모두 다르다. 학자들은 <창세기> 1.1-2.4a를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 사제가 기록했다고 해서 ‘사제 작가’(Priestly Writer)라고 부른다. 이 사제는 희생제사의례에 등장하는 용어와 이집트와 바빌론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며, 신을 이스라엘인들만의 용어인 ‘야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인 신명인 ‘엘로힘Elohim’을 사용하였다. 엘로힘은 영어로는 God으로, 한국어로는 ‘하나님’ 혹은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다. 이 신명은 이 두 창조이야기에서 정확하게 <창세기> 1.1-2.4a에서만 등장한다.
<창세기> 2.4b-2.25에 등장하는 신명은 ‘엘로힘’이 아니라 ‘야훼 엘로힘’Yahweh Elohim이다. 영어로는 The Lord God이고 한국어로는 ‘야훼 하나님’ 혹은 ‘주 하나님’이다. 이 신은 이스라엘인들의 고유한 신명인 ‘야훼’와 일반적인 신명인 ‘엘로힘’을 결합한 문구로, 굳이 번역하자면 ‘야훼가 신이다’라는 뜻이다. 이 창조이야기를 기록한 자는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에 정착한 상상력이 풍부한 여성작가다. 그녀는 신을 농업을 발견하고 정착 생활하는 인간을 도와주는 신이다. 야훼 엘로힘을 우주나 인간을 창조할 때, 일반적인 히브리 동사인 ‘아사עָשָׂה’를 사용하였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영감을 적어놓은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고대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거룩한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경전이다. 경전은 여느 책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책들은 작가가 말하고 고전들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에게 말을 걸지만 경전은 신이 인간에게 깨우침을 주는 책이다. 기원전 4세기경, 이 책의 내용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유대 편집자들은, <창세기>를 무슨 이야기로 시작할까 고민에 휩싸였다.
나는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조이야기의 특징은 ‘창조하다’라는 의미로 각각 사용한 ‘바라’와 ‘아사’의 어원을 통해, 그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바라’라는 용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자.
<창세기> 1장 1절에 등장하는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바라’ 유대 사제들의 종교언어다.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 때 유대 지식인이며 사제인 한 무명작가가 ‘바라’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인류에게 가장 유명한 창조 서사시를 써내려갔다. ‘바라’는 유대 사제 희생 제사 용어, ‘신에게 드리는 희생제의를 위해 숫양의 살을 발라내다’라는 의미다.
<창세기>의 시작은 이렇다. 이 시작은 <창세기>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성서 전체의 시작이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히브리어 원문에는 원래 모음이 표시되지 않았다. 위 문장을 알파벳으로 음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brʾšyt brʾ ʾlhym ʾt hšmym wʾt hʾrṣ
자음으로만 구성된 위 문장을 암호와 같다. 단어를 발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모임이기 때문에, 자음으로만 적힌 위 문장을 읽을 수가 없다. 위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유대학자들이나 사제들이었다. 경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 유대학자들은 의도적으로 모음을 생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이 원전을 자기 마음대로 읽기 시작하자, 기원후 1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모음을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모음이 첨가된 <창세기> 1장1절의 음역과 발음은 다음과 같다.
bərē(ʾ)šît bārā(ʾ) ʾĕlōhîm ʾēt hāš-šāmayîm wəʾēt hā-ʾāreṣ
버레쉬쓰 바라 엘로힘 에쓰 핫-샤마임 워-에쓰 하-아레츠
<창세기> 아니 구약성서를 시작하는 첫 문자는 히브리어 전치사 ‘브ב’다. ‘브’는 집을 상징하는 문자로, 사방 중 삼면에 닫혀 있고 입구가 열려져 있는 집을 상징한다. 물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제외한 자상과 공중에 사는 동물들은 생태적으로 잠을 자야하기 때문에 거주할 장소가 필요하다. 영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타’beta는 셈족어에서 집을 의미하는 단어인 *bayt에서 유래했다. *bayt-는 셈족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아카드어 bīt(um), 아랍어 bayt(un), 히브리어 bayit.
‘브’ב는 무에서 유의 상태로 가지 위한 준비이자 거대한 수용체다. 플라톤이 우주창조를 상상하여 기록한 <티마이오스>에서 언급한 ‘있음’과 ‘생명’이 탄생하기 위한 원인이자 과정이며, 그래서 결과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처음’을 시작해야했기 때문에, 전치사 ‘브’ב를 사용하였다. ‘브’ 글자의 상단은 신의 도움조차 거부하겠다는 경계다. ‘브’ 글자의 오른편도 닫혀있다. 히브리어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과거와 결연히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브’글자의 아래는 상단 선보다 약간 길게 늘어져있다.
‘브’ב 글자를 구성하는 삼면과는 달리 왼편은 무한하게 열렸다. 혼돈이 질서로 전환하려는 잠재력과 위력이 빈 공간으로 표시하였다. 이 빈공간은 히브리 문학의 특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스 문학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저자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세하게 알려준다. 음유시인은 자신의 노래를 듣는 관객들을 보면서, 그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내용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노래를 멈추고, 과거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세세하게 설명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대표되는 서양문학의 특징을 알려주는 라틴어 문구가 있다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ēs다. 이 문구를 축자적으로 번역하면 in the middle of things다. 음유시인이 관객들을 위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 회상하여 설명한다. 서양문학은 관객들과 독자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가 적절한 시점에 그것을 풀어주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히브리문학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궁금증을 자아낸 후, 영원히 해답을 주지 않는다. 독자나 관객들은 그 행간을 읽고 각자가 자신의 삶의 처지에 알맞게 해결책을 내 놓아야한다. 히브리문학은, 그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불안과 공포, 희열과 안심을 선물한다. 이런 방식을 ‘엘로퀀치아 엑스 시렌치오’eloquentia ex silentio라고 부른다. 번역하지면 ‘침묵 속에 웅변’이다.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험한 한 유대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주의 기원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대서사시를 히브리 전치사 ‘브’로 시작한다. ‘브’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1. 장소 앞에 사용된 처소격 전치사로 ‘-에서’
2. 성과를 내기 위해 물건이나 사람 앞에서 도구격으로 사용되어 ‘-을 통하여’
3. 그 다음에 등장하는 단어를 강조하기 위한 감탄사로 ‘진실로’
성서의 첫 단어 히브리어 전치사 ‘브’는 앞으로 신이 인간과 함께 펼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거대한 마당이다. 이 히브리어 전치가가 무엇을 담았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6세기 무명저자는 우주의 거대한 수용체, 플라톤이 말한 ‘코라’와 같은 장소 ‘브’에 ‘레쉬쓰ראשית’를 담았다. ‘레쉬쓰’는 흔히 ‘신체의 머리’를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이나 말의 ‘시작始作’이기도 하다. 그 시작은 식물의 씨앗이나 동물의 정액과 같이 미세하지만 무한하게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다. 수용체 ‘브’가 담은 것은 처음이라는 시간時間이다. ‘브’는 ‘처음’이라는 시간이 존재하게 위한 가상공간이다. 공간은 시간이 만들어낸 정교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맨 처음, 공간이 먼저 존재할 수 없다.
‘처음’이란 의미를 ‘레쉬쓰’는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브’와 함께 이루어진 ‘브레쉬쓰’는 다음 세 가지로 번역가능하다:
1. ‘처음에’
2. ‘처음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3. ‘진실로 처음에’
나는 2번째 의미를 선호한다. 신은 우주라는 공간을 창조하기 전에, 시간을 창조하였다. 당시 고대근동의 문명들은 공간空間을 중요하게 여겼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26세기부터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기원전 23세기부터 지구라트를 건설하였다. 파라오는 지상에서의 삶은 잠깐이고 천상에서의 삶을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가 영원히 거주할 공간인 피라미드를 자신의 궁궐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축하였다. 수메르 왕들은 벽돌들을 쌓아올려 구조물인 지구라트를 건축하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지구라트는 하단은 넓고 상단은 좁아지는 계단식 삼단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들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경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건물이지만, 역설적으로 사실 자신이 상상한 신을 그 공간에 감금시키겠다는 오만이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예루살렘이란 공간의 축조와 해체는 유대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신을 가시적인 공간에 모시지 않고 비가시적인 공간인, ‘시간’을 구별하였다.
히브리문화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화나 그리스-로마 문화와는 달리, 시간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던지, 공간을 초월하는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인간들은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에 탐닉하고 그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치러왔다. 현대인들에게도 공간의 정복은 중요한 본능이다. 컴퓨터에서 가상공간을 만들어 정복하려하고, 달과 화성과 같은 우주를 정복하려한다. 공간정복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히브리문화는 ‘시간정복’에 관한 이야기다. <창세기> 1.1에 등장하는 첫 세 단어는 ‘신이 진실로 처음이라는 시간을 창조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조’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맨 처음에’라는 부사구다음에 바로 등장하는 단어는 ‘신’이 아니라, 동사 ‘창조하다’다.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그리스인들은 ‘크리쪼kritzō’ 그리고 로마인들은 라틴어로 ‘크레아레creare’로 잘못 번역하였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번역을 다시 번역한 서양인들의 번역, 그리고 그 번역을 다시 번역한 한글번역은 ‘창조創造’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라는 의미다.
‘바라 ברא’는 유대 사제들이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던 단어다. 유목민에게 양 한 마리는 전 재산이다. 희생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여 신에게 드림으로, 앞으로 일 년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은 자연을 통해 그가 키우는 양떼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신선한 목초와 맑은 물을 선물해 주기 때문이다. 목동은, 숫양을 죽여 가죽을 벗긴 후, 양의 속살 중 가장 기름진 부분을 발라낸다. 고대인들은 신은 기름이 불에 달구어지고 연소될 때, 풍기는 향기를 맡는다는 생각했다. 목동은, 이때 숫양의 살을 바르고 발라, 가장 좋은 부분을 갈라낸다. 이 가장 좋은 부분이 히브리어로는 ‘토브’tov, 즉 ‘최선’이다. ‘토브’라는 단어는 동시에 ‘향기가 좋은’이란 의미도 지닌다. ‘바라’ 즉 ‘창조’란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하나인 최선을 발견하기 위해, 군더더기를 발라내는 집중이며 용기다.
<창세기> 1장 1절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포로로 잡혀온 유대 사제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희생제사’ 의례에 등장하는 어휘인 ‘바라’를 이용하여 우주창조를 표현하였다.
“신은 맨 처음에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의 가시적인 표현이 공간이며 우주입니다. 신이 창조행위는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부터, 쓸데없는 것들을, 마치 사제가 희생양을 예리한 칼로 발라, 그 궁극의 살 한 점을 남기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생각, 말, 행동을 가려내는 묵상과, 그것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과감하고 단호하게 잘라내는 내야합니다. 이 덜어낼 것을 가려내는 지혜와 그것을 실제 행위로 옮기는 용기가 바로 창조입니다. 신이 창조행위를 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하늘과 우리가 발로 밟고 있는 땅, 그리고 그 땅 아래 존재하는 지하세계입니다.”
당신은 삶에서 군더더기를 정성스럽게 발라내고 있습니까? 창조적인 삶은, 자신의 삶을 깊이 관조하여,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내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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