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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길>
2022.1.30 (日曜日) “누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만한가? (2): 그(녀)는 장엄莊嚴한가?”
리더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심오한 안목을 통해,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다. 그가 그 길로 들어선다고 해도, 흔적도 남기지 않을 초행길이다. 그는 마침내 결정한다. 자신의 양심이 말하는 그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그는 새벽 여명에 일어나 마침내 그 길로 들어선다. 11행에서 15행은, 그 순교자적인 산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날 아침, 내 앞에는 두 길이 있었다.
낙엽엔 발자국이 없었다.
아, 나는 그 첫 번째 길을 다른 날을 돌아오기 위해 남겨두었다!
그러나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11-15행)
자신이 선택한 길은 종말론적이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시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장소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소아시아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만물은 강물처럼 다시는 담을 수 없이 항상 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삶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 지금-여기를 '도'(道)라고 여긴다. 그런 삶을 구가하는 사람은 먼 훗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한숨 지며 말할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두 길이 한 숲에 갈라져 있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바로 내가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했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16-20행)
나는 이 시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인생에 대한 찬양 시로 잘못 해석해 왔다. 오래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것이 프로스트가 의도한 깨달음이 아닌 것 같다. 시인은 먼 훗날 우리에게 자신이 '사람들이 덜 간 길'을 선택했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두 갈래 길에 왔을 때, 두 길은 '똑같이 좋아 보였다'라고 회상한다. '사람들이 덜 간 길'은 사실은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시인은 아마도 과거에 두 번째 다른 길이 아니라 '첫 번째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미래에 그 길을 '사람들이 덜 간 길'이라고 확신하고 위안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이 시는 남들이 선뜻 취하지 못할 길을 과감히 선택한 개인의 성공 신화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삶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 '자기 신뢰'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인지 아닌지 그 안목이 없다는 것이다. 안목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그 해답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부화뇌동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깊은 묵상을 통해, 어렴풋이 등장하는 양심의 소리만이 옳다.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연주가는 대중이나 평론가의 간섭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의 선율이 그들의 닫힌 마음을 감동적으로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리더의 양심이며 나침판이다. 자기 신화는 '자기기만'과 다르다. '자기기만'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굉장한 자신으로 포장하여 남들에게 전시하려는 성급한 마음이다.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은 숭고하며 감동이다. 왜냐하면 그 여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자신들의 보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다. 깊은 사고를 통해, 갈림길에서 자신의 혼을 담을 수 있는 선택을 감행한다. 자신에게 리더인 자가 대중에게도 리더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선까지 그런 리더의 언행을 보고 싶다. 대한민국을 문화선진국으로 만들 리더는 등장할 것인가? 우리가 선택할 사람은 “장엄莊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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