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6. (水曜日) “푱푱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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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6일 아침 노래하는 설악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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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6. (水曜日) “푱푱푱”

태초에 빛이 없다면 무엇이 있었을까? 빛이 없었다면, 소리가 먼저 있었다. 소리는 만물을 존재하게 만드는 최초의 정보다. 소리는 다른 존재와 소통하려는 친절이다. 설악면은 동지冬至가 지나면, 신비한 소리가 저 호숫가로부터 들려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한참 들어야, 귀에 들리는 신비한 소리다. 그 소리는 영화 <스타워스>에 등장하는 우주총에서 나오는 ‘푱푱푱’ 소리와 유사하다. 주인공 스카이워커가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정말 스카이워커인가? 조용을 실천하는 겨울밤은 이 소리를 밤새도록 낸다. 일 년내내 출렁이던 호수도 쉬기로 결정하면서, 자신을 두꺼운 얼음으로 둘러싸면서, 내기 시작한 소리다.

아침 일찍 반려견들과 함께 겨울 찬 공기를 헤치고, 집 앞 호숫가 보트하우스로 내려갔다. 호수 건너편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설악 읍내 시장에 오기 위해 오래전에 만든 선착장이다. 조용한 아침이다. 그런 가운데, 우주총소리 혹은 채찍 소리가 저 멀리서 간간히 들린다. 시간차로 돌림노래를 하듯이, 호수 전체에 울려 퍼진다. 이 한 겨울에 호수가 자신의 존재를 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호수는 자신이 걸어온 1년을 회고하며 회화의 울음과 기쁨의 웃음, 기상천외한 소리로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이 음악소리의 주인을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10년 전 이곳으로 이사해 왔지만, 처음 몇 년 동안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호수는 내 곁에서 노래하고 있었지만, 나는 귀머거리가 되어,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전자제품을 통해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익숙해져, 정작 나를 부르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식이 경험을 통해 지혜가 될 때, 일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호수가 부르는 얼음 노래를 듣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호수가 노래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저 멀리서 알 수 없는 짐승이 칠흑가운데 비명을 지른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오감으로 경험한,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들으려한다. 그것 이외에는 도무지 들으려하지 않는다.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해야한다. 진정한 부자는 부산을 떨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요한 시공간을 자기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가난한 자는 주위의 소음에 익숙해져 중독된 사람이다. 신비한 소리는, 그것을 경청하고자는 간절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 들린다.

이 소리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예술과 다르다. 소리는 동일한 것을 반복하지 않는다. 자연 속 깊은 속에서 생겨난 소리는 무한하게 다양하여 그 무엇을 흉내 낼 필요가 없다. 그 차디찬 독창성이 우주의 언어로 내 심연을 흔들어 놓는다. 세상의 말로는 담을 수 없는, 눈이 덮인 히말라야 산맥에서 조용히 걸어다는 검은 호랑이 발자국 소리다. 인간의 심연을 울리기에, 그것 자체로 진리다.

둘째, 이 선착장에 내려와 조용히 귀를 기우릴 여유가 없었다. 만일 내가 이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내 몸을 움직여 차가운 공기를 헤치고, 이 선착장으로 내려고 한참 침묵을 연습해야했다.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이 소리의 출처는 신비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단테가 <인페르노>에서 한 언덕을 올라가면서, 오른 발은 위로 내디뎠지만, 왼 발은 힘이 빠져 어려운 상황을 토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른 발이 호기심과 지성이라면, 왼발은 의지와 추진력이다.

이 아침 선착장에 내려와 아이폰을 꺼내, 거대한 얼음으로 변한 호수와 호수가 내는 소리를 영상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음호수는 하늘을 어렴풋이 담고 있는 거대한 거울이다. 낮에는 태양을 태우고 밤에는 달고 별들을 그 표면에 태워 빛을 반영한다. 거기에는 봄의 새싹도 없고, 여름의 새소리도 없다. 차디찬 얼음 위에 부는 바람만이 겨울의 침묵을 노래한다. 나는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부산스런 내 자신을 차분하게 정지시킬 것인가? 봄을 기다리며 충분히 침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