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5. (火曜日) “회심回心”

사진

<에케 호모>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치세리 (1821-1891)

유화, 1880, 380 cm (12.4 ft)

Museo Cantonale d’Arte

2022.1.25. (火曜日) “회심回心”

서양문학과 정신의 어머니는 장님이라고 알려진 호메로스가 노래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750년경, 적어도 350년이상 노래로 불리던 트로이 전쟁과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 이 두 권은 정교한 운율을 가진 노래로, 각 음절이 강약약dactylic, 그리고 행이 육음절hexameter로 이루어져 모두 27,803행 장구한 서사시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극복하는 가치, 즉 명성을 추구하는 이야기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금까지 현대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불멸의 명성을 획득하였다. 불멸의 명성을 그리스어로 ‘클레오스κλέος’라고 불렀다. 우주 안에서 무생물은 영원히 남지만, 생물은 시간이 지나면, 자취를 남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죽더라도 남길 영원한 자취를 ‘클레오스’라고 불렀다. 클레오스의 어원은 ‘부르다’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동사 ‘클루오’κλύω에서 유래했다. 명성은 살아 생전에 자신이 한 언행을 통해 얻는 가치로 ‘타인이 나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다.

<오디세아아>의 가치는 다르다. 이 책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다르다. 그에겐 타인들이 인정하는 명성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원래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아내 페넬로프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고향 아타카로 돌아간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북극갈매기가 자신의 고향으로 수만 킬로를 날아 돌아가는 것처럼, 연어가 산란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수천km를 귀향하는 것과 같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을 돌아가지 못하도록 수 많은 방해꾼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원래 뿌리로 돌아가는 ‘귀근歸根’을 그리스어로 ‘노스토스νόστος’라고 부른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쉽고 아픈 마음이 ‘노스텔지어’nostalgia다.

인간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세상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비로소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가 있다. 바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 돌아가는 사건을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사건을 넘어선 영적인 추구다. 인간은 자신이 생명을 부여받는 그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노력이 훈련이고 수련이면, 자신의 고향에서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이 깨달음이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3장은 1세기 유대의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빌라도는 로마에 있는 황제를 신으로 모셨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말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려움과 삶의 핵심을 알려주기 위해 13장 1절에 예수님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한다. ‘엔 아우토 토 카이로’ἐν αὐτῷ τῷ καιρῷ 즉,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말한다.

οὐχί, λέγω ὑμῖν, ἀλλ’ ἐὰν μὴ μετανοῆτε, πάντες ὁμοίως ἀπολεῖσθε.

ouchi legō hymin all'ean mē metanoēte pantes homoiōs apoleisthe

욱히 레고 휘민 알레안 메 메타노에테 판테스 호모이오스 아폴레이스테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예수는 이 구절은 13장 5절에서도 똑같이 반복한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동일한 구절은 한절 걸러 두 번 반복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예수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 구절의 핵심은 ‘메타노이에테’라는 그리스 단어다. ‘메타노이에테’는 과거의 인간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그것은 애벌레가 누에고치 안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 전혀 다른 생물인 훨훨 날라 다니는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나비는 자신이 애벌레였다는 사실은 물론, 자신이 오래 지냈던 고치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καινὴ κτίσις이다. 오래된 것은 사라지고, 보라 새 것이 되었다ἰδοὺ γέγονεν καινά.”

우리는 ‘메타노이에테’라는 단어를 흔히 ‘회개悔改’로 번역한다. 십계명을 어기거나 교회나 종교가 정한 율벙을 어긴 것을 상기하여, 그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용서를 비는 행위로 여긴다. 메타노이에테는 ‘회개’보다 심오하고 근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 단어는 ‘회개’가 아니라 ‘회심回心’이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돌아가야 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스토스’, 즉 귀근의 행위이며, 그곳에서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는 본래의 마음, 즉 본심本心을 회복回復하는 용기다. 회심이란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의 심연으로 돌아가는 회심이다.

메타노이아를 철학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학교들 만들어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파이테이아’ 즉 교육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메타노이아’ 즉 ‘마음을 변환시키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플라톤은 진선미를 간직한 원형인 ‘에이도스’로 인도하는 체계적인 훈련이 ‘교육’이며 교육의 목표는 ‘메타노이아’ 즉 원형으로 인도하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창세기> 1장에서도 인간 창조의 비밀을 기록하였다. 기원전 6세기 유대 저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의 모양대로’ 창조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인간은 신의 숨결을 품고 있는,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인 존재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자신, 그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생명을 부여받을 때, 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십시오. 그 회복이 바로 ‘메타노이아’이며 ‘회심’이다. 만일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한 우리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을 타인을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면서 결국 원망하며 삶을 허비할 것이다.

우리가 회심하지 못하는 상태를 <누가복음> 저자는 ‘아폴레스테’로 표현하였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가야 할 고향을, 자신이 경주해야 할 결승점을 알지 못하면,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풀어져 완전히 파괴된 상태를 ‘올뤼미’란 동사 앞에 강세 어미 ‘아포’가 붙은 ‘아폴레이스테’는 갈 길을 잃은 처량한 상태다. 불행은 인생에 있어서 명성, 권력, 혹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본향을 알지 못하고 헤매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