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라스코 동굴 사고 벽화>
기원전 1만2000년
프랑스 라스코 동굴
2022.1.21.(金曜日) “엑스터시ecstasy”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속모습은 짐승이었다. 아직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했고, 자신의 욕망과 본능대로 행동하는, 생각할 줄 모르는 반인간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부터 30만년전에 북아프리카 튀니지아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이곳에서 현생인류의 DNA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유인원 유골을 발견하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당시 유럽의 숲을 휘졌고 다니던 네안데르탈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러시아 툰드라 지역의 데니소바인들과 같인 유인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들과 경쟁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위사람들과 전략적으로 제휴를 맺고, 필요에 따라서, 그런 존재를 궁지에 몰기도하였다.
3만4천년경, 새로운 호모 사피엔스들 가운데, 새로운 ‘인종’이 등장한다. 극소수가 자신의 생존보다는 공동체의 생존, 경쟁보다는 협력, 살해보다는 희생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절실하다고 깨닫았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와 물질적인 염기서열은 동일하지만,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염기서열이 확연하게 다르다. 그들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그 심중에 후대 종교나 문명이 말하는 고귀한 가치인, 자비, 사랑, 인과 같은 가치를 품은 자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대부분 호모 사피엔스이라는 범주에서 머물고, 짐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벽화가 있다. 구석기 시대 벽화가 그려져 있는 라스코동굴의 후진에 위치한 특별한 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같은 의미심장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포효하며 죽어가는 황소와 그를 사냥한 호모 사피엔스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냥꾼의 마음을 상상해야 한다.
당시 인류에게 맘모스처럼 큰 동물 사냥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족의 생존을 상당기간 보장해준다. 그렇다고 사냥꾼이 맘모스에 대해 적대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맘모스를 사냥하기 전에 들에서 뛰놀던 맘모스와 그 가족들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생존을 위해 사냥해야 하지만, 동시에 맘모스에 대한 동정심으로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최근 인류학자들은 아직도 원시적인 사냥을 하는 부족들은 자신의 가족이자 심지어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자라고 여기는 동물을 사냥해야 하는 운명에 상당히 고통을 느낀다고 전한다.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하는 부시맨들은 사슴과 같은 동물이 남긴 발자국을 추적해 독을 바른 화살을 쏜다. 독화살을 맞은 사슴은 서서히 죽어간다. 그들은 동물과의 불가분의 유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죽어가는 사슴을 붙잡고 사슴이 울면 자신도 울면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극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동참한다. 어떤 부족은 동물의 가죽을 입거나 동물의 피나 배설물을 천막에 발라, 의례적으로 그 동물이 지하 세계로 가는 길을 함께 준비한다.
그들은 사냥에서 자신들이 죽여야 하는 동물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동물이 지닌 위엄이나 용맹성을 흠모했을지 모른다. 자신이 생존을 위해 죽여야 하는 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냥할 동물을 위해 미리 용서를 비는 의례를 행했다. 이 그림을 그린 예술가는 당시 최고의 사냥꾼으로 부족 전체를 위해 사냥해야 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바타이유가 말하는 동물 살해라는 ‘금기’ 행위를 통해 생명 살해라는 ‘반칙’을 저지를 계획이다. 이 그림은 바로 사냥꾼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자신의 행위를 자연과 생명의 순환선상에서 보려는 시도다. 혹은 그가 사냥 후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는 의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맘모스의 배에서는 창자들이 터져 나온다. 맘모스의 왼쪽 앞 다리 끝이 두 개로 갈라져 있다. 다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했다. 뒷다리는 몸에 비해 너무 가늘어 커다란 몸집을 지탱하기 힘들다. 사냥꾼이 던져 상처를 낸 창이 맘모스의 엉덩이 부분에서 땅으로 사선으로 그려졌다. 사냥꾼은 맘모스의 배를 공격해 지금 막 창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맘모스는 고개를 돌려 쏟아져 나오는 창자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맘모스 앞에는 한 사냥꾼이 등장한다. 사냥꾼이 실제로 맘모스 앞에 누워 있는 모습은 아니다. 사냥꾼은 맘모스가 죽어갈 때, 자신도 함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죽어간다는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사냥꾼은 맘모스에 비해 연약하다. 문명의 이기인 무기와 이성을 통해 맘모스를 제압했다. 사냥꾼의 심리상태는 그의 몸의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다.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의 용어를 빌리면, 그는 ‘비정형’이며 기형이다. 우선 두 다리의 길이가 다르다. 오른쪽 다리는 길고 왼쪽은 짧다. 맘모스처럼 사냥꾼의 몸도 해체되고 있다. 자신이 유지하던 정상 상태에서 이탈해 비정상적 엑스터시로 진입하고 있다. 비정형성은 양팔과 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팔 역시 두 발과 마찬가지로 길이가 다르다. 오른팔은 왼팔에 비해 길고 굽었으며 손가락은 네 개다. 왼팔은 거의 목에 붙어 있고 뒤틀려 있다. 왼손 손가락도 네 개다.
사냥꾼의 유난히 긴 몸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의 성기다. 사지는 뒤틀리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성기만은 서 있다. 끝이 뾰족하지만 상당한 크기다. 그는 죽음을 통해 생명을, 해체를 통해 통합을, 엑스터시를 통해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사냥꾼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사냥꾼 앞에 있는 새 솟대의 새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면 착용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진입해 태어나기 위한 연습이다. 혹은 사냥꾼 자신이 죽어가는 맘모스를 두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어 착용했는지도 모른다.라스코동굴 벽화는 인류가 자연과 우주의 정교한 관찰을 통해 그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라스코동굴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의 예배당이었다. 그리고 맘모스와 인간을 그린 ‘후진’은 지성소다. 그들은 이 지성소에서 사냥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깊이 묵상하고, 죽어가는 맘모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을 통해 다시 태어나도록 연습했다. 인류의 조상들은 심지어 동물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의례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된 자신에 대해 묵상했다. 인류는 자신이 사냥하는 맘모스와 하나가 되어 ‘엑스타시ecstasy’ 즉 삼매경三昧境으로 진입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이른 아침 고요한 가운데, 자신이 정한 지성소로 들어가, 자신이 호모 사피엔스인지 혹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지를 관찰해야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면,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여, 오늘이라 불리는 미래를 자신에게 감동적인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몰입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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