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유토피아 04>
오스트리아 화가-작가 마키스 바르라미스Makis E. Warlamis (1942)
유화,
오스트리아 발트피아텔 미술관Kunstmuseum Waldviertel
2022.1.18. (火曜日) “로쿠스 아모이누스locus amoenus”
단테의 애를 태우며 아쉬운 노래가 <인페르노> 제4곡이다. 단테는 제 4곡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스승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스라엘, 아랍의 사상가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며 거주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단테는 이들을 위해 지옥 안에, 자신들만의 정원과 성을 만들어 끊임없이 대화하는 장소를 마련한다. 그가 이들을 존경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도 있다. 이들은 생각과 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상아탑에 감금된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nsci(1891-1937)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들은 자신들이 상아탑에 감금되어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비유기적인’in-organic 인간들이다. 신체의 일부가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프기 마련인데, 이들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 아픈 부위를 자신의 일부라고 분리하여 무관심한 자들이다. 유기적인 지식인은 전통적인 법이나 교리에 의해, 자신의 언행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속해 있는 당면한 사회문제를 articulate, 즉 첨예하게 분석하여 구분하고 그 근본적인 방안을 마련한다.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가 <인간조건>이란 책에서 용어를 빌리자면, 인간의 삶의 조건conditio humana과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단계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비타 콘템블티바’vita contemplativa ‘묵상의 삶’만 일삼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묵상을 실제 동으로 옮기는 vita activa를 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이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둥글고 자전한다는 사실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망원경을 만들어 가능하게 만들었다. 묵상이 자신의 입을 통해 이웃에게 드러나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타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자들이다. 지옥은 변화가 없는 공간과 시간이다.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지옥에 거주하는 자들의 특징은 지상에서 하던 일들을 똑같이 반복한다는 점이다.
단테는 <인페르노> 제3곡에서 지옥문을 지나 지옥의 가장자리에 도착한다. 이 가장자리를 ‘림보’limbo라고 부른다. ‘림보’에서 유래한 이탈리아어 ‘렘보’lembo는 드레스나 남성 자켓의 끝부분을 지칭한다. ‘림보’는 지옥문을 지나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장자리다. 단테는 이곳을 지옥 안에 위치시켰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지옥과는 분리된 공간으로 만들이다. 이곳은 지상의 정원의 모습처럼, 지옥안의 별도의 공간이다.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장소를 ‘로쿠스 아모이누스’locus amoenus로 설명한다. 이 장소는 로마 영웅들이 용맹스러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침내 휴식하는 공간이다. 림보는 이중적이며 위험한 공간이다. 영웅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여 마음의 경계를 풀고 쉬기 시작하는 동안, 예상치 않은 유혹이 등장한다. 로마인들은 ‘로쿠스 아메이누스’에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한다고 믿었다. 나무, 꽃, 그리고 물. 이 정원은 동 떨어진 장소로 도시와 시골생황의 중간으로 하염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멈추는 피난과 휴식의 장소다.
서구문학작품에서 호메로스를 시작하고 테오크리투스,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호라티우스에 이르기까지 유한한 인생을 정신없이 사는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묵상의 장소이자 시간이다. 오비디우스는 <변신>에서 로쿠스 아메아누스를 ‘로치 테리빌리스’loci terribli 즉 ‘끔찍한 장소들’이라고 부른다. 한눈을 파는 사이에,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살기에 완벽한 장소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뱀이 거주하는 장소다.
단테의 림보는 의로운 이교도인들이 거주하는 장소다. 의로운 이교도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인들, 특히 철학자들이나 문필가들과, 그리스도교 이후에도 인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은 단테는 자신이 존경하는 철학자, 시인, 과학자, 정치가들이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질문에 고심한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비타 엑티바’를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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