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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씨 사우톤>
1세기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국립 박물관 소장
2022.1.15. (土曜日) “너 자신을 알라!”
인간은 혼자이면서 여럿이다. 부모를 통해 세상에 와 의존적이지만, 인생을 개척해야하기에 독립적이다. 여럿과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얼마나 훌륭하게 가지냐가 그 사람의 품위이고 행복이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가족이나 선택을 통해 끈끈한 인연을 맺은 부부간에 품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항상 죄책감과 의무감이 그 관계를 왜곡시키기 십상이다.
나는 우연이지만 필연과 같은 인연을 맺어, 처음 보는 그들과 우정을 쌓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긴다. 태풍태권도 사범님과 12명의 아이들, 화요 단테수업과 수요 니체수업을 위해, 원근각지에서 오시는 도반들이 그렇다. 태풍아이들은 2021년 1월, 내 책들, <심연>, <수련>, <정적> 그리고 <승화>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필사했다는 사실을 정성스런 편지에 담아 보냈다. 나는 아이들의 편지에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들과 어감을 확인하고 놀랐다. 이 아이들은 나와 인연이 되어, 매주 영어작문, 영어회화 그리고 Jonathan Livingston Seagull을 배우고 암기하고 암송한다. 그들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실제로 교육이 수강자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아카데미를 세운 후,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수단을 ‘파이다이아’paideia
(παιδεία) 즉 ‘교육’이라고 확신했다. ‘파이다이아’는 ‘어린아이’를 의미하는 ‘파이스’(παῖς)에서 파생된 명사로, 갓난아이가 처음으로 혼자 걸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는 체계다. 교육은 땅만 보고 네 발로 기어다시는 동물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저 멀리를 응시하기 위해 눈을 15도 위로 들고 의연하게 걷도록 부추기는 응원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유아독존이 아니라, 타인과의 간격을 유지하며 그 사람의 독립적인 공간, 시간, 생각을 존경하고, 서로의 다른 점을 개성으로 축하하고 갈등의 요소가 있다면 숙고와 토론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아테네에서 추구한 두 가지 가치를 ‘칼로스 카가쏘스 καλὸς κἀγαθός’라고 불렀다.
이 문구는 ‘아름다운’이란 의미를 지닌 ‘칼로스’와 ‘착한’이란 의미를 지닌 ‘아가쏘스’로 구성되어있다. ‘칼로스καλός’는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의 오랜 수련을 통해, 그녀의 언행에서 개성과 품위가 어김없이 드러난다. 타인은 그런 사람을 ‘아름답다’라고 평가한다. ‘아가쏘스ἀγαθός’는 그 사람이 지닌 아름다운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정화하고 상승시키는 힘인 ‘덕’이다. 이 사람은 중용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희로애락으로 여기는 자비심을 가진 자다.
선과 미를 획득하여 탁월한 인간을 추구하는 자가 매일 스스로에게 자문해야할 문구가 있다. 이 문구는 그리스 델피 아폴로 신전 앞마당(pronaos)에 새겨져 있는 세 개 문구들 중 하나로 다음과 기록되어있다:
γνῶθι σεαυτόν
gnōthi seauton
그노씨 세아우톤
함께 발견된 다른 두 문구는 “무리하지 말라”와 “확신은 미친 짓이다”다. ‘그노씨 세아우톤’은 소크라테스의 두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각자 스승을 인용하면서 기록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 최초의 비극시인인 아이스킬로스는 비극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제우스의 명령에 의해 절벽에 묶여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불평을 듣고 바다의 신 오케이누스가 그에게 던진 말이다.
‘자신을 안다’라는 문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이 문장의 목적어 ‘세아우톤’이란 그리스어 명사를 분석하면 이렇다. ‘세아우톤’을 3인칭 단수 재귀대명사로 ‘그 자신’ 혹은 ‘그녀 자신’이란 뜻이다. 문장에서 목적어는 주어와 분리된 객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그 목적어가 자신의 일부로 표시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하나는 동사를 능동(혹은 수동)으로 사용하지 않고, ‘중간태’로 사용한다. 동사의 효력이 동사의 목적어에 적용되지 않고, 주어에 적용된다. 또 다른 방법은, 목적어를 재귀대명사로 사용하는 경우다. ‘세아우톤’는 ‘그를’ 혹은 ‘그녀를’을 의미하는 ‘아우톤’앞에 ‘세’를 접두하여, ‘그 자신’ 혹은 ‘그녀 자신’이란 의미다. 영어로는 himself 혹은 herself에 해당한다.
‘나’를 대상으로 바라 볼 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주관적인 나’다. ‘나’라는 존재는 ‘너’라는 존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상대적인 개념이다. ‘너’없이 ‘나’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충분한 조건이다. ‘나’를 보는 시선에 따라 구분하면 셋이다. ‘내가 보는 나’, ‘나와 이해관계가 있는 네가 보는 나’, 그리고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3인칭에서 보는 나’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나’다. 내가 나의 친구, 친구, 동료, 혹은 나를 아는 사람과 과의 관계에서 괜찮은 사람일 때, 그들이 부여하는 존경을 얻는다. 내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낯선 자, 낯선 동물, 더 나아가 낯선 생명과 조화롭게 생존하기 위해 괜찮다면, 나는 극복인, 초인, 각성인, 구별된 존재, 신적인 존재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인칭이라는 미로에 갇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똑똑하고 근사하지만, 2인칭이나 3인칭이 보기에 진부하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에서 ‘너 자신’이란 2칭과 3인칭의 견지에서 본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니다.
‘알라!’라 의미를 지닌 ‘그노씨γνῶθι’는 무슨 의미인가? ‘그노씨’는 ‘알다’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동사
‘기그노스코’γῐγνώσκω (gignṓskō)의 2인칭 단수 아오리스트aorist 능동 명령형이다. 그리스어 명령동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위 ‘현재 명령’present imperative이고 다른 하나는 ‘완료명령’aorist imperative다. 현재 명령은 지속적인 행위를 요구하고, 완료명령은 한번 시도하여 완료를 요구한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기억 속에 담고 있기 때문에, 기그노스코 동사는 ‘완료명령형’만 존재한다. ‘안다’라는 말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대상에 대해 완전히 파악한다는 의다. 예를 들어, ‘나는 운전할 줄 안다’에서 ‘안다’라는 의미는 운전교습과 연습을 통해, 고속도로에서도 운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알고, 결점을 수정하고, 장점을 신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기적이 1인칭에 빠져, 우연히 안 세계를 전부하고 착각하고 그 소용돌이에서 헤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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