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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갈참나무의 피부>
2021.12.5. (日曜日) “cotidie morimur”
인생의 패러독스가 있다. 누구나 오래살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늙거나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우주의 심판자인 시간을 거역할 수 없다. 인간의 성배인 장수長壽는 회춘이나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늙거나 더디게 죽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이자, 정치가 특히 비극작가였던 세네카는 지식인이며 자신의 이상을 용감하게 현실에 적용하는 행동가다. 그가 로마의 폭군 네로의 과외선생이었다가 후에 그의 고문이었지만. 네로를 암살하려는 음무에 관련되어 자살을 명령받았다. 1세기 로마 엘리트들은, 그런 경우에, 자신의 손목 동맥을 의도적으로 잘라 과다출혈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네로 황제 당시, 많은 인사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세네카는 달랐다. 자신의 죽음을 삶의 일부이자, 삶의 절정으로 여기고, 비극작가답게, 정교한 연출을 통해 자신이 죽음을 재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로마 교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동맥을 자르고, 독배를 마셨고 그 후에 증기 목욕탕에서 질식사로 죽었다. 혹자는 그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흉내 낸 인생 패배자라고 평가하지만,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세네카가 친구들과 가족 앞에서 천천히 그리고 담대하게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세네카는 이 죽는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신의 서기관에게 필사하도록 명령했다.
죽음은 인생의 일부이로 축하할 대상이지 감추거나 부인할 대상이 아니다. 세네카는 죽음에 관한 많은 에세이와 편지를 남겼다. 그는 2000년이 지나 그의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인간의 필멸必滅을 숙고해 보라고 권한다.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인 죽음에 관한 세네카의 가르침은 다음 두 라틴어 단어로 충분히 요약된다:
cotidie morimur
코티디에 모리무르
“우리는 매일 죽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언제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염세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의 넋두리가 아니다.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큰 깨달음이다. 그 각성으로 그(녀)는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여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각성은 10년 단위나 1년 단위엔 유효하지 않다. 세네카는 아침일찍 일어나 이 주기도문을 자신에게 암송하라고 요구한다.
일생은 하루라는 가시적이며 상상할 수 있는 단위의 연속이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건너 띠고는 일생이 구성될 수 없다. 그런 거르기는, 하루의 문제가 아니라 일생의 문제이며, 그런 삶은 이미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바쁨’이다. 우리는 기대라는 최면에 걸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해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걸어간다.
하루는 다시 24시간으로 구성되어있고 1시간은 60분으로 나뉜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은, 한 시간을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에 몰입한다는 의미다. 그 몰입은 미래의 기대를 이미 지금 실현시키는 기적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일을 찾지 못해 빈둥거리거나 게으름을 핀다면, 일생은 벌써 저 만큼 도망가 있다. 인간은 모두 가장 소중한 자산인 ‘하루’라는 시간을 부여받았다. 이 시간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갚을 수 없는 재산이다.
세네카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상상하고 죽음을 친지들 앞에서 연출한 이유는 무엇인가? 살마들은 그가 에피쿠로스 쾌락주의자처럼, 죽음마져 즐겼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기소를 기각한 로마 관원 루이쿠스 안나이우스 노바투스(<사도행전> 18.12-17의 등장하는 갈리오)가 세네카의 동생인 점을 감안하여, 세네카가 스스로 피와 물 안에서 세례의식을 거행했다고 주장한다. 로마인들의 이런 사생관은 죽음을 고행으로부터의 자유와 조력자살을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하루를 살 뿐만 아니라 죽는다. 그러나 하루를 잘하고 살죽기 위해서는 인생이란 경험이 가져다준 지혜가 필요하다. 세네카는 죽음의 이해와 극복이 얼마나 힘들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Tota vita discendum est mori
토라 비타 디스켄둠 에스트 모리
“(잘) 죽기 위해서 일생이란 배움의 시간이 필요하다”
혹은 “우리는 죽는 방법을 깨닫기 위해, 일생이란 시간을 보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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