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8. (火曜日) “무관심無關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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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론 강으로 가는 미지근한 사람들>

영국 화가-작가 윌리엄 블레이크 (1857-1927)

잉크화, 1825

2021.12.28. (火曜日) “무관심無關心”

2021년의 나의 행적을 돌아본다. 나는 어떤 인간이었나? 나는 알량한 이기심에 빠져, 나, 내 가족, 내 친족 이외 다른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무관심했는가? 무관심은 인간이 지닌 수동적인 성격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과 행복을 저해하는 최악이다. 정의의 반대말은 불의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타인의 운명에 먹을 귀를 가져다며 관심이 있는 척하나 불쌍한 사람들 앞에서 흘리는 악어눈물 뒤에 숨겨진 사악한 인간의 마음이다. 현대문명은 무관심을 찬양하는 기계이며,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관심에 탐닉하는 인간을 도와주는 거대한 작동원리다. 무관심이 인류의 문화와 문법이 되어, 디스토피아를 앞당기고 있다.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작가 엘리 위젤(1928-2016)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적인 행위를 최악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거나 창피를 당할 때마다, 그런 고통과 창피를 당하는 장소에서 항상 침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피해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침묵은 괴롭히는 주동자를 독려합니다.” 위젤은 가공할 만한 역사적 사건과 폭력 앞에서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을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 비겁한 자들의 머리에는 ‘자기이익’이라는 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문호 단테도, 최악의 인간을 무관심한 인간, 이쪽 편에서 저쪽 편에도 서지 않는 미지근한 인간으로 소개한다. 단테와 베르겔리우스가 지옥입구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아케론 강으로 가고 있다. 그 강을 건내야, 지옥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 경계에 도달하가도 전에, 울부짖는 사람들의 공포스런 굉음을 듣는다. 이곳은 별이 내는 빛도 없고, 시간이 없어 변화도 없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장소다. 단테는 <인페르노> 제3곡 22-33행에서 그 끔찍한 장소를 이렇게 표현한다.

22. Quivi sospiri, pianti e alti guai

23. risonavan per l'aere sanza stelle,

24. per ch'io al cominciar ne lagrimai.

22. 여기, 지옥 현관에서 한숨과 울음과 드높은 통곡이

23. ‘별이 없는’ 대기를 통해 퍼져나갔다.

24. 나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25. Diverse lingue, orribili favelle,

26. parole di dolore, accenti d'ira,

27. voci alte e fioche, e suon di man con elle

25. 익숙하지 않은 언어들, 끔찍한 말들

26. 고통스런 표현, 분노에 찬 억양들

27. 커다란 소리와 희미한 소리들, 그리고 손바닥으로 서로를 치는 소리

28. facevano un tumulto, il qual s'aggira

29. sempre in quell' aura sanza tempo tinta,

30. come la rena quando turbo spira.

29. 언제나 ‘시간이 없는’ 어두운 대기에서

28. 그들은 스스로 몰아치는 굉음을 냈다.

30. 그것은 마치 회오리바람이 불 때, 움직이는 모래와 같았다.

<인페르노> 제3곡 22-30행

(해설)

단테가 만난 지옥엔 별이 없는 칠흑과 같은 어둠이다. 별은 신의 현존이며 신이 창조한 시간의 상징한다. 공간은 시간이 만들어 낸 장소다. <아이네아스> VI.534에 지하세계를 tristis sine sole domos 즉 ‘슬프고 태양이 없는 거주지들’이라고 묘사한다. 지옥은 ‘귀’로만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아직 단테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각은 썩은 냄새 때문에, 이미 마비된 지 오래다. 지옥을 경험한 단테의 첫 반응은 울음이다. 그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의 고통을 자신도 느끼기 시작하여 ‘슬픔’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들”이란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오만을 보고 언어를 혼동시켜 다양하게 만들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만든다. diverse의 (1) ‘서로 다른’이란 의미와 (2) ‘이상한’이란 의미다. 단테는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리를 듣고 베르길리우스에게 질문한다.

27행에 등장하는 e suon di man con elle는 ‘손바닥을 치는 소리’을 의미한다. 보카치오는 Inferno IX.49-51설명에서 ‘battiensi a palme’ 즉, ‘스스로 손벽치기’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분노의 여신들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비통해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죄인들은 손벽으로 자신의 몸을 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친다.

지옥은 29행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시간이 없는’sanza tempo 장소다. 지옥의 영원성에 대해 초대교부 알렐산드리아 학파 오리게네스(185-254년)는 형벌과 교졍의 필요성울 강조하면서 지옥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 어우구스티누스는 <마태복음> 25장을 인용하며 주님의 선언은 되돌릴 수 없기에 죄인들은 영원한 불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지옥과 천국은 영원한 장소지만, 그 세밀한 의미가 다르다. 지옥의 영원은 ‘시간의 부재sanza tempo’(Inf. 3.29)이지만 천국은 ‘시간의 외부/초월di tempo fore’(Par. 20.16)이다. 지옥의 영원은 ‘기간’을 의미하지만 천국의 영원은 ‘영원한 지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지옥은 지속인 이유는 형벌의 불이 그치지 않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단테는 보에티우스Boetius의 영원구분, 즉 영원한 지속과 영원한 비시간을 적용하였다. 지옥이 ‘시간부재’인 이유는 시간을 측정하는 천제 들, 별이 없기sanza stelle(Inf. 3.23) 때문이다. 지옥은 별이 없고 시간이 없는 장소다. 지옥은 희망이 없고 해야 할 일이 없는 무료한 장소다. 단테가 이들이 어떤 영혼들이냐고 베르길리우스에게 질문하자, 베르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34. Ed elli a me: "Questo misero modo

35. tegnon l'anime triste di coloro

36. che visser sanza 'nfamia e sanza lodo.

34.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 끔찍한 상태는

35. 불쌍한 영혼들에 의해 생겼다. 그들은

36. 누구의 욕도 먹지 않고 누구의 칭찬도 듣지 않았다.

37. Mischiate sono a quel cattivo coro

38. de li angeli che non furon ribelli

39. né fur fedeli a Dio, ma per sé fuoro.

37. 그들은 천사의 악한 부류와 어울렸다.

38. 신에 대항하여 반항도 하지 않고 순종도 하지 않았다.

39. 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했다.

40. Caccianli i ciel per non esser men belli,

41. né lo profondo inferno li riceve,

42. ch'alcuna gloria i rei avrebber d'elli."

40. 하늘은 그 아름다움을 해칠까 봐, 저들을 내쫓고

41. 심오한 지옥조차 그들을 수용하지 않았다.

42. 악한 천사들이 저들과 함께 영광을 가져가지 않기 위해서다.

(해설)

이들은 지옥조차 거부한 사람들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현관문, 즉 안테-인페르노ante-inferno에 거주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찾지 못해 누구의 편도 서지 않은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편지(<요한계시록> 3;15-1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5.Οἶδά σου τὰ ἔργα, ὅτι οὔτε ψυχρὸς εἶ οὔτε ζεστός. ὄφελον ψυχρὸς ἦς ἢ ζεστός.

16.οὕτως, ὅτι χλιαρὸς εἶ, καὶ οὔτε ζεστὸς οὔτε ψυχρός,

μέλλω σε ἐμέσαι ἐκ τοῦ στόματός μου.

15. 나는 당신의 행위들을 압니다. 당신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면 좋겠습니다.

16. 당신이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제 입에서 뱉어 버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15-16

지옥은 현관을 지나고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지옥은 무시무시한 강을 지난 저 건너편이 위치한다. 이곳에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일을 찾지 못한 자들이다. 이들은 누구의 칭찬도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고 무의미하게 인생을 산 자들, 즉 비겁한 자들이다. 단테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비겁한 사람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섞여 있다. 그들은 신에게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신에게 충성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만 따로 떨어져 존재했다.” (<지옥편> 3곡 37-39행) 단테는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괴로워 스승 베르길리우스에게 그들의 왜 이곳에 있는지 묻는다.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왜 나는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반대하는가?”(1967년 4월 30일)에서 이 구절들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지금, 저는 베트남에서 전쟁에 관하여 말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단테와 동의합니다. 지옥은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 위기 상황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침묵이 배신이 되는 시간이 왔습니다.” 단테는 이 미지근한 사람들을 지옥에 가장 뜨거운 곳에 두지는 않았지만, 침묵이 배신이 되는, 도덕적 중립이 최악이라는 지적은 옳다.

단테는 그런 인간, 최악의 인간의 인간, 미지근한 인간을 ‘산자 인파미아 에 산자 로도’라고 표현한다. 번역하자면 ‘누구의 욕도 먹지 않고 누구의 칭찬도 듣지 않는’인간으로 정의한다. 이들이 주로 하는 행위가 있다.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무작정 따라간다.

43. E io: "Maestro, che è tanto greve

44. a lor che lamentar li fa sì forte?"

45. Rispuose: "Dicerolti molto breve.

43. 그래서 내가 말했다: “스승님, 무엇이 그리 애통해서

44. 그들이 이렇게 심하게 슬퍼합니까?”

45. 그가 대답하였다: “내가 간단하게 말하겠다.

46. Questi non hanno speranza di morte,

47. e la lor cieca vita è tanto bassa,

48. che 'nvidïosi son d'ogne altra sorte.

46. 그들은 죽음의 희망이 없다.

47. 그들의 맹목적인 삶은 너무 비참해서

48. 그 어떤 다른 지역도 부러워한다.

49. Fama di loro il mondo esser non lassa;

50. misericordia e giustizia li sdegna:

51. non ragioniam di lor, ma guarda e passa.”

49. 세상은 그들의 이름을 용납하지 않고

50. 자비도 정의도 그들을 무시한다.

51. 그들에 대해 말하지 말자. 그저 보고 지나치자!”

<인페르노> 제3곡 44-51행

(해설)

스승은 간단하게 이들의 본성을 설명한다. “그들은 죽음의 희망이 없다. 그들의 맹목적인 삶은 너무 비참하다. 그들은 다른 (지역/사람의) 몫을 부러워한 사람들이다.”(<지옥편> 3곡46-48행) 이 비겁한 자들의 삶 자체가 저주다. 그들은 지옥과 같은 자신의 삶을 마감할 죽음을 바랄 수 없다. 이들은 인생이란 무대에 올랐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인생이란 마라톤 경주에 참가했지만, 목표점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인생의 비참은 부와 권력의 유무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해하는 목적을 상실한 맹목성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타인의 운명을 부러워하다 인생을 마감한다. 그 운명은 타인의 운명이자 임무이기 때문에, 내가 완수할 수 없다.

단테는 48행에서 ‘소르테’sorte라는 이탈리아 단어를 이용하여 ‘몫’을 표현하였다. ‘소르테’는 인도-유럽어 어근 ‘세르’(*ser-)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 본래 의미는 ‘실로 묶다; 연결하다’라는 의미다. 운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퍼즐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맞추는 노력이다. 나만의 모습이 드러날 퍼즐 맞추기가 아니라, 남의 모습을 흉내 낸 퍼즐 맞추기는 독창적이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 깃발을 들고 가는 사람을 좀비처럼 따라간다.

52. E io, che riguardai, vidi una 'nsegna

53. che girando correva tanto ratta,

54. che d'ogne posa mi parea indegna;

52. 그리고 내가 쳐다보니, 펄럭이는 한 깃발을 보았다.

53. 그것이 어찌 발리 내닫던지

54. 그 깃발은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55. e dietro le venìa sì lunga tratta

56. di gente, ch'i' non averei creduto

57. che morte tanta n'avesse disfatta.

55. 그 뒤에 끊이지 않는 긴 영혼들이 왔다.

56.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57. 죽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망쳐놓았다.

<인페르노> 제3곡 52-57행

(해설)

비겁한 자들의 인생목표는 ‘안정’이다. 그들은 결코 모험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천국도 지옥도 그들을 거부한다. 이들은 죽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허상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일이다. 단테는 이들이 시시각각 펄럭이는 깃발을 따라가는 좀비로 묘사한다. “내가 두 눈으로 소용돌이치는 깃발을 본다. 그것이 너무 빨리 움직여 결코 가만있지 않는다. 깃발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았다. 죽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 할 일 남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지옥편> 3곡 55-57행) 이들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옥에도 똑같이 다른 자극에 의해 반응할 뿐이다. 이들은 나체가 되어 지속적으로 모기와 말벌이 쏘는 침으로 공격당해 온몸이 피와 눈물로 범벅되었다. 그들은 죽기를 원하지만 죽을 수 없는 운명이다.

미국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립>이란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일정한 교육을 받으면, 다음과 같은 확신에 도달하게 됩니다. 부러움은 무식이고 흉내는 자살행위입니다. 인간은 그것이 좋든지 싫든지 자기자신을 자신의 몫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드넓은 우주는 좋은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양가 있는 어떤 곡물의 낱알도 자신에게 주어진 땅의 작은 지면에 주어진 토양을 통하지 않고는 생겨나질 않습니다.”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끈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은 1922년 계간지 <크라이테리언>을 창간하고 자신의 시 <황무지>를 발표하였다. 그는 1차세계대전을 치룬 유럽을 ‘황무지’로 표현하였다. <황무지> 1부에 실린 ‘죽은 자의 매장’이란 시의 60-66행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3곡의 영감을 받아 다음과 같이 썼다.

Unreal City,

Under the brown fog of a winter dawn,

A crowd flowed over London Bridge, so many,

I had not thought death had undone so many.

Sighs, short and infrequent, were exhaled,

And each man fixed his eyes before his feet.


“비현실적인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아래에서,

군중들이 런던 브리지 위에 넘쳐났다. 너무 많다.

나는 죽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짧고 드문드문 나오는 한 숨이 터져 나왔다.

각자는 자신의 눈을 발에 고정시켰다.” (60-66행)

사람들은 안개로 가려진 실제가 아닌 가짜 세계에 살고 있다. 엘리엇은 런던브리지 위로 걸어서 출근하는 좀비와 같은 군중들을 바라본다. 그는 단테의 <지옥편> 3곡 57행을 그대로 인용하여 ‘나는 죽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은 죽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면서 터벅터벅 어디론가 가고 있는 자신의 발만 쳐다볼 뿐이다.

2021년에 나는 미지근한 자였는가? 나의 판단과 결정을 유보하고, 다른 사람이 만든 깃발을 따라 좀비처럼 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