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5. (土曜日) “크리스마스의 의미意味”

사진

<목자들의 경배>

(정중앙에 목자들이 마리아보다 크게 묘사되었다)

15세기 플랑드르 화파 주자인 휘호 판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1440 –1482)

포르티나리 세폭 제단화에 그린 유화, 1479, 253 cm x 586 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휘호 판 데르 후스는 15세기 플랑드르의 가장 중요한 화가였다. 판 데르 후스는 특히 제단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대표적인 제단화인 포르티나리 세폭 제단화(the Portinari Triptych)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사실주의와 색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대 화가 얀 반 에이크와 쌍벽을 이루는 플랑드르 화가다.


2021.12.25. (土曜日) “크리스마스의 의미意味”

크리스마스는 전복이며 희망이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전복이며, 그 신의 탄생을 알아본 사람은 철학자나 위정자가 아니라, 들판에서 생계를 걱정하며 잠을 설치던 목자들이었다는 점에서 희망이다. 심지어는 마리아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구원자란 사실을 몰랐다. 목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여 마음에 두었다고 전한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 번지수도 없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신’이라는 역설의 축제다. 누가 신인가? 신은 저 하늘에서 황금마치를 타고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오는 환상적인 존재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2000년 전에 일어 났는 대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을 거대한 성당이나 교회 혹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이나 경치에서 찾으려한다. 미안하게도, 신이 그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우상주의자들에게 실망스럽게도, 신은 그곳이 있지 않다. 신이 어느 곳에 있느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온갖 정성을 드려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에는 계실 리가 없다. 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착각이며 오만이고 자신의 협소한 생각과 교리에 감금시킬려는 인간의 억지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란 이원론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철학과 종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또한 신이라는 폭탄선언이다. 복음서들 가운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되어 다른 복음서들의 원자료가 된 <마가복음>에는 예수탄생이야기가 없다. 예수를 스토아철학자 혹은 영지주의 사상가로 소개하여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수로 소개하고 싶은 <요한복음>에서도 예수의 탄생기사는 없다.

<누가복음>의 탄생기사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누가복음> 2.8-20에 예수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그 주인공은, 천사도, 아기예수도, 마리아도 아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목동들’이다. <누가복음> 2.8은 이렇게 시작한다.

Καὶ ποιμένες ἦσαν ἐν τῇ χώρᾳ τῇ αὐτῇ ἀγραυλοῦντες

καὶ φυλάσσοντες φυλακὰς τῆς νυκτὸς ἐπὶ τὴν ποίμνην αὐτῶν.

“그리고 목동들이 지붕이 없는 들판인 ‘코라’에 있었다.

그들은 밤 동안 자신들의 양떼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복음> 2.8

(해설)

‘포이메네스ποιμένες’는 자신에게 맡겨진 가축을 지키는 사람인 ‘목동’이다. 목동은, 양이나 염소를 팔거나 잡아먹어 자신의 편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다. 그래서 목동은 양이 풀을 뜯던 위험한 공간인 ‘코라’에서 밤을 지낸다. 특히 밤이 오면, 늑대와 코요테가 와서 양을 물고 가야하기 때문에 밤을 지새운다. 목동들이나 양떼가 저녁에 들판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 봄, 여름, 혹은 가을일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으로 둔갑한 것은 첫 번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허용된 종교로 편입하면서, 당시 로마제국의 신인, ‘절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Sol Invictus의 축제일인 동짓날 12월 22일과 합치면서 생겨났다. 그 날에 삼일만의 부활을 더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로 정했다. 두 번째는 뉴욕의 메이시 백화점이다. 메이시는 이윤을 내기 위해,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트리, 산타클로스, 그리고 선물을 주고받는 관행을 덧붙여 대성공하였다.

하여튼 목동들이 양떼를 지키기 위해 하늘이 열린 빈 공간인 ‘코라’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코라χώρᾳ’는 도시도 아니고 완전히 버려진 사막도 아니 경계의 땅이다. 인간은 그 경계에서 유유자적할 때, 숭고한 존재가 되고 기적을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동은 이 위험한 경계의 공간에서 자신만 바라보며 먹을 것을 찾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마치고 있었다. 목동은, 우리주변에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몰입하여 하루하루 이타적인 삶을 실천하는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것으로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이다. 요즘 신문에 소개되는 휴지를 일생 주워, 그것을 불우이웃이나 장학금으로 기꺼이 내놓은 우리사회의 목동들이다. 목동들은 자신들이 천사인줄 모른다. <누가복음> 2장9절은, 목동들이 자기들 가운데 천사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καὶ ἄγγελος Κυρίου ἐπέστη αὐτοῖς

καὶ δόξα Κυρίου περιέλαμψεν αὐτούς,

καὶ ἐφοβήθησαν φόβον μέγαν.

“그랬더니,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그들 곁에 이미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 주위를 빛나게 만들었다.

그들은(목동들은) 몹시 두려웠다.”

<누가복음> 2.9

(해설)

‘주의 천사’는 누구인가? 이 문구의 의미를 좀 더 파악하기 위해, 누가가 원래 히브리어 표현을 추정해보면 된다. ‘앙겔로스 퀴리우ἄγγελος Κυρίου’라는 문구는 히브리어로 ‘말악 야훼’(מלאך יהוה)다. ‘말악’은 ‘천사’ 혹은 ‘전령’이란 의미이고 ‘야훼’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의미다. 그러니까 ‘주의 천사’란 우리 주위에서 절망과 우울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삶의 환희를 전달해주는 존재다. 이 세상이 아직도 살만한 이유는, 그런 존재들이 주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혹은 산, 강, 나무, 혹은 꽃과 같은 자연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끼는 책, 만년필, 혹은 볼펜일 수도 있다. 그런 천사들은 우리 곁에서 항상 우리의 눈에 들기를 기다린다.

목동들은, 그런 천사를 동료의 얼굴에서, 혹은 자신이 보살펴야하는 양떼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내가 아침에 산책나가기를 주저하면, 반려견 벨라는 어느새 내 곁에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벨라가 나를 처다보는 줄로 모르고 책을 읽다가, 벨라의 얼굴을 보면, 벨라는 온몸을 S자로 흔들고 꼬리를 흔든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환한 광채를 내뿜으며 한없는 기쁨을 선사한다.

누가복음 저자는 목동들의 이 깨닫는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주님의 영광이 그들 주위를 빛나게 만들었다.” ‘주님의 영광’에 해당하는 ‘독사 퀴리우’는 히브리어 ‘카보드 야훼’(כבוד יהוה)의 번역이다. 그리스어 ‘독사’나 히브리어 ‘카보드’는 눈이나 귀로 들을 수 있는 빛이나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아우라다. 그것은 우리가 노자나 붓다와 같은 성인을 만났을 때, 그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신적인 위엄이다. 그들이 실제로 광채를 휘두르고 등장하지 않는다. 천사가 천사인 이유는, 그(녀)가 만나는 존재를 행복하고 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벨라는 나를 언제나 웃게 만들고 환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의 천사다.

목동들은 이 천사의 등장으로 당황하였다. 그들은 천사는 하늘에 존재하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법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런 천사를 자신의 주변에서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천사는 당황한 목동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ῖς ὁ ἄγγελος Μὴ φοβεῖσθε·

ἰδοὺ γὰρ εὐαγγελίζομαι ὑμῖν χαρὰν μεγάλην, ἥτις ἔσται παντὶ τῷ λαῷ,

“그리고 그 천사가 그들에게 말핬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 이제 보십시오. 내가 백성들에게 가져올 큰 기쁨의 복음을 당신들에게 (먼저) 전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10

(해설)

우리가 일상에서 그런 천사의 존재를 알게 되면 놀란다. 마치 마리아를 통해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받은 후, 그녀는 두려웠다. 목동들은 천사가 지상에 내려왔다할지라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제들이나 학자들에게 먼저 갈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런 천사는 제일 먼저 자신의 일에 몰입하며 작은 행복과 연민을 실천하고 있는 목동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백성들에게 가져올 큰 기쁨의 복음을 당신들에게 가장 먼저 전하겠습니다.” ‘큰 기쁨’을 의미하는 ‘카란 메가렌’(χαρὰν μεγάλην)은 인간이 한번도 그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는 삶의 희망이자 환희다. 천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원래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전에 내려오던 달력을 정리하여 7월과 8월을 추가하여 태양력으로 전환하였다. 그가 제국의 기반을 잡으려 할 때, 자신이 치리하던 속국에 내린 대사면이 담긴 비밀 편지가 복음이었다. 속국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범죄자들이, 느닷없이 온, 황제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대사면되었다. 로마제국에서 이 황제를 편지를 ‘유앙겔리온’euangelion, 즉 ‘복음’이라고 불렀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서 가장 볼 잘 것없이 마굿간에서 태어난 그 아이가 메시아이며 신이라는 소식이다. 그 아이가 메시아라면, 인간은 누구나 메시아가 될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천사는 목동들에게 다음과 같은 복음을 전달한다:

ὅτι ἐτέχθη ὑμῖν σήμερον Σωτήρ, ὅς ἐστιν Χριστὸς Κύριος, ἐν πόλει Δαυείδ.

καὶ τοῦτο ὑμῖν σημεῖον, εὑρήσετε βρέφος ἐσπαργανωμένον καὶ κείμενον ἐν φάτνῃ.

“왜냐하면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들을 위해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그가 곧 그리스도 주시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그는 강보에 쌓인 갓난 아이를 발견할 것이다.

그는 구유에 누어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2.11-12

(해설)

천사가 인류의 구원자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 아이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구원자가 될 존재의 표식이 더 놀랍니다. 그 표식은 강보에 싸여 가축의 먹이통에 누워있는 갓난아이’다. ‘갓난아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브레포스βρέφος’는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지칭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서정시인 핀다로스때부터 ‘갓난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전에 구원자들은 알렉산드로스나 다리우스 대왕처럼, 왕족집안에서 테어나 남다른 교육을 받아 지혜롭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들이었다. 누가는 전혀 다른 영웅이자 구원자를 소개한다. 이 새로운 구원자는 말 구유통에 불쌍하게 강보로 쌓여있는 어린아이다. 누가 나에게 베들레헴이라는 촌구석 마굿간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구원자라고 나에게 말하면,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누가는 누가 구원자이며 누가 메시아인가를 이 파격적인 문장에서 소개한다. 한마디로 누구나 메시아로 구원자로 태어났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그런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누가는 인간들이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는 이 말을 건낸 후에, 다음과 같이 노래를 한다:

καὶ ἐξαίφνης ἐγένετο σὺν τῷ ἀγγέλῳ πλῆθος στρατιᾶς οὐρανίου

αἰνούντων τὸν Θεὸν καὶ λεγόντων

Δόξα ἐν ὑψίστοις Θεῷ καὶ ἐπὶ γῆς εἰρήνη ἐν ἀνθρώποις εὐδοκίας.

“그런 후, 갑자기 수많은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그런 구원자를 등장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겐 평화다’.”

<누가복음> 2.13-14

(해설)

천사들의 합창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마지막에 등장한 문장이다. “땅에서는 그런 구원자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겐 평화다”라는 문장은 복음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다. 구원자는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심지어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헐벗은 곳에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생각한 사람에게 평화가 임할 것이다.

맨 나중에 등장하는 ‘유도키아스εὐδοκίας’는 ‘구원자 등장의 의외성과 파격성을 깊이 생각하고 수용하’ 혹은 ‘그런 등장을 최선이라고 생각하다’라는 의미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메시아가 될수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인 ‘평화’이자 ‘평온’이다. ‘평화’를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히브리단어 ‘샬롬’(שלום)의 번역이다.

샬롬은 오래된 셈족어 단어다. 기원전 23세기 경, 고대 아카드어에 처음 등장한다. 아카드어 ‘샬림’šalima-는 소작농이 국가에서 빌린 돈이나 물건을 모두 갚아, 채무관계가 사라진 상태를 이르는 경제용어다. 이 단어가 도덕적이먀 윤리적인 의미로 전환되어,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깨닫고 그것에 몰입하는 순간, 그녀에게 다가오는 한없는 환희와 평원이 바로 ‘샬롬’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런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평온을 선사한다. 목자들은 천사들을 떠나, 진정한 구원자의 탄생을 목격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리고 아기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머무는 마굿간을 찾아간다.

καὶ ἦλθαν σπεύσαντες, καὶ ἀνεῦραν τήν τε Μαριὰμ καὶ τὸν Ἰωσὴφ

καὶ τὸ βρέφος κείμενον ἐν τῇ φάτνῃ·

ἰδόντες δὲ ἐγνώρισαν περὶ τοῦ ῥήματος τοῦ λαληθέντος αὐτοῖς

περὶ τοῦ παιδίου τούτου.

καὶ πάντες οἱ ἀκούσαντες ἐθαύμασαν περὶ τῶν λαληθέντων ὑπὸ τῶν ποιμένων πρὸς αὐτούς·

ἡ δὲ Μαρία πάντα συνετήρει τὰ ῥήματα ταῦτα συνβάλλουσα ἐν τῇ καρδίᾳ αὐτῆς.

“그들은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수소문하여 찾아냈다.

그들이 눈으로 이들을 확인한 후에,

이 아이에 관해 전해 들은 말들에 관해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주었다.

목자들이 말한 내용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마리아만은 이 일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숙고하였다.”

<누가복음> 2장 16-19절

(해설)

목자들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방금 아이를 출산한 부부를 찾았다. 그 부부는 요셉과 마리아였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전해들은 복음은 부모에게 알렸지만, 그들의 반응은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어리둥절, 혼동, 그리고 놀람이다. 18절에 목자들의 말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이란, 좁게는 요셉과 마리아였을 것이고, 넓게는 그들의 친족과 친척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놀라운 복음을 대개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복음은 20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목동들의 복음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여 숙고한 유일한 인물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목동들의 복음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συντηρέω), 그것을 스스로 숙고하였다(συμβάλλω)고 기록한다. 목동들이 전한 복음을 마리아는 아직 완벽하게 수용하지는 않고, 그 복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기 시작했다. 목동들은 이 복음을 아기 예수의 부모에게 전달하는 천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임무를 마치고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들판으로 돌아갔다.

메시아의 탄생을 최초의 목격한 자는 목동이었다. 목동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일상적이며 진부한 곳에서 메시아를 발견하였다. 심지어, 요셉을 자신의 아들이 메시아인 줄 몰랐고 마리아는 목동을의 말을 듣고 묵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크리스마스는 전복과 희망의 축제다. 목동처럼, 경계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