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달을 보며 묵상하고 있는 두 남자>
독일 낭만주의 확 카스퍼 다비드 프리트리히(1774–1840)
유화, 1820, 35 cm x 44.5 cm
독일 드레드덴 Galerie Neue Meister
2021.12.23.(木曜日) “경청傾聽과 질문質問”
(2021.12.26. 렉셔너리)
귀도 눈만큼 그 대상을 차별하고 구별한다. 눈도 귀도 어제까지 자기가 경험하여 약간의 호기심과 쾌락을 주는 것만을 보고 들어, 그것만 지속적으로 경험하려한다. 영어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층위들을,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구분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그저 보는 것을 ‘룩’look이라 부른다. 눈앞에 나왔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보는 행위다. 그것에 대한 판단도 없다. 그저 보는 것이다. 이런 행위와는 달리, 그 대상에 끌려 관찰자의 시선을 그 대상에 두는 경우에 전치사 at, upon, 혹은 into와 같은 전치사가 필요하다. 관찰자의 시선을 잠시 두는 것이다. 만일 관찰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대상을 오랫동안 볼 경우, ‘워치’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야간경계’라는 의미를 지닌 night watch처럼, 밤을 온전히 셀 만큼 정성을 드려 보는 행위다. 우리가 연극, 영화 혹은 연주를 볼 때, 사용하는 동사가 ‘위치’다.
영어에서 듣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는 ‘히어’hear다. 내가 한 장소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는 경우 ‘오버히어’overhear란 단어를 사용한다. 무심코 듣는 행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듣는 행위를 ‘리슨’listen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리슨은 자신이 들으려는 대상 앞으로 귀를 가져가기 때문에 전치사 to를 항상 사용한다.
그리스도교 복음서 가운데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만 등장한다. <누가복음> 2장 41-52절은 예수가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유월절 의례를 준수하러 올라갔다 일어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유대인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탈출한 경험을 기억하여 명절로 지켰다. 파라오를 중심으로 한, 계급사회에서 국가가 강요한 노동만 하던 사람들이, 자신만의 임무와 자유를 찾기 위해 사막으로 뛰쳐나온 사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쉴 곳을 마련해 주었던 노동의 노예로 사는 것이 편했다. 그런 타인이 강요한 현상유지를 깨고, 자신의 누구인지 알기 위해, 이들은 사막으로 나와, 자신을 찾는 긴 여정을 떠나야했다.
이렇게 용감하게 뛰쳐나온 사람들이 ‘히브리인들’Hebrews이고 그들의 리더가 모세Moses다. ‘히브리’라는 히브리 단어의 위미는 ‘경계를 추월하다;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다’라는 영적이며 사회적인 용어다. 이들의 리더인 ‘모세’Moses라는 이름은 고대 이집트어로는 ‘(다시) 태어나다’이고 히브리어로는 ‘건져내다’이다. 모세는 새롭게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인간의 상징이며, ‘자기를 과거의 자신, 노예였던 자신을 구해내는 영웅’이란 의미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어에 육체의 쾌락에 안주하던 이들을 탈출하기 위해 신은 니산Nisan월 14일째 되던 날, 기이한 일이자 상징적은 사건을 기록한다. 신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기기 위해, 죽음의 신이 내려와 한 가족의 맏아들을 죽인다.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희생해야한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인간도 과거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바쳐야한다. 모세를 따라 스테터스 퀴오status quo로부터 탈출할 용감한 사람들은 오래된 자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리는 상징적은 의례행위를 한다. 니산월은 히브리인들의 달력으로 신년의 첫달, 1월에 해당하며, 우리 달력으로는 봄인 3-4월이다. 니산נִיסָ֗ן이란 히브리 단어는 ‘출발하다; 다시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이 의례를 한국어로는 ‘유월절過越節’,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over라고 부른다. 이 두 단어 모두 ‘히브리’의 원 의미는 ‘넘어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패스오버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기 위해, ‘동지와 같은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죽음의 경계를 견디고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그 경계를 넘어가는 이유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봄에 씨앗을 파종해야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족들과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준수하러 간 나이가 12세였다. 남아는 12세, 여아는 13세가 삶의 결정인 순간이다. 신체적으로 대뇌大腦)의 좌우기능이 분화하는 소위 뇌의 편재화偏在化 (lateralization)시작되는 시기다.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마친 인간이 본격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스승을 찾아가는 본격적인 교육의 시기다. 서양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며, 학생들은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모든 유대인들일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유월절 축제를 지낸 후,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예수의 부모도 친척들과 함께 하룻길을 고향으로 간 후였다. 그들은 예수를 친척가운데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를 찾기 시작한다. 만 삼일 만에,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이자 학교에서 랍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질문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다음은 <누가복음> 2장 46절이다:
<누가복음> 2장 46절
καὶ ἐγένετο μετὰ ἡμέρας τρεῖς εὗρον αὐτὸν ἐν τῷ ἱερῷ
καθεζόμενον ἐν μέσῳ τῶν διδασκάλων
καὶ ἀκούοντα αὐτῶν καὶ ἐπερωτῶντα αὐτούς·
카이 에게네토 메타 헤메라스 트레이스 헤우론 아우톤 엔 토 히에로
카테쪼메논 엔 메소 톤 디아스칼론
카이 아쿠온타 아우톤 카이 에페로톤타 아우투스
“삼일이 흘러갔다. 예수의 부모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발견하였다.
랍비들 사이에서 좌정하여
그들의 말을 경청敬聽하고 그들에게 질문質問하고 있었다.”
이 구절은 청소년 예수가 성년成年이 되어 성인聖人으로 변모하기 위한 두 가지 징검다리를 알려준다. 하나는 경청敬聽이고 다른 하나는 질문質問이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듣는 행위다. 경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경청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 자녀와의 문제, 친구와의 갈등, 부부와의 관계도 이 경청의 부재에서 온다. 경청은, 오랜 수련을 거쳐야 도달 할 수 있는 궁극의 실력이다. 우리는 인류가 남긴 감동적인 고전과 경전을 독서하고 필사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경청의 최소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책을 하는 이유는 자연의 소리를 침묵으로 경청하려는 훈련이고, 굳이 해외까지 나가 명소를 둘러보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모습을 목도하고 경청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경청은 한마디로 역지사지를 위한 자기 훈련이다. 그런 역지사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경청의 비밀은 ‘지금’이다.
경청을 훈련하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떠든다. 월트 휘트먼이 <자기를 위한 노래>에서 그렇게 말만 하는 사람들에 제3곡에서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I have heard what the talkers were talking, the talk of the beginning and the end,
But I do not talk of the beginning or the end.
There was never any more inception than there is now,
Nor any more youth or age than there is now,
And will never be any more perfection than there is now,
Nor any more heaven or hell than there is now.
“저는 말만하는 사람들이 말만하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처음과 끝에 대해 떠듭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이나 끝에 대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시급한 처음은 결코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젊거나 더 늙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천국이나 덜 지옥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청할 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경청은 외부의 말을 본능적으로 들으려는 귀를 구부려 자신으로 온전히 향하게 하려는 훈련이다. 경청을 하는 사람이 질문할 수 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다. 무의식적으로 얻은 지식을 버리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자에게 질문은 슬그머니 자신의 모습을 나타나 길을 막는 괴물이 등장한다. 이 괴물은 ‘질문’은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안내자다. 질문을 통해 우리는 매일 매시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자신이 매달렸던 신념이나 삶의 본질本質을 버리고, 낯선 시간과 장소에 맞는 본질을 찾기 위해 통과하는 문(問)이 바로 ‘질문’인 것이다. 질문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제3자가 되어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해답이 정해지지 않는 외침이기도 하다.
교육은 외부의 정제되지 않는 그리고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정보를 수용하는 처리가 아니라, 가만히 좌정하여 자연과 인류 성현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려 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여, 그것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질문하는 정교한 예술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경청한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질문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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