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달항아리>
박부원, 57cm x 57cm, 2012
2021.12.10. (金曜日) “도야陶冶”
(<요가수트라 훈련경> 경구 2)
인생은 덜 것은 덜고 더할 것은 더하는 뻴셈과 덧셈의 줄다리기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자만이 뺄 수 있다. 그 뺀 공간에 다름을 모셔, 친절이나 배려라는 덧셈을 베풀 수 있다. 덧셈과 뺄셈이라는 예술과정이 ‘도야陶冶’다.
10년 전 쯤, 나는 지인들을 초대하여,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원요’를 찾았다. 이곳은 지당 박부원선생님의 도자기 공방이다. 선생님께서는 40cm이상 크기의 백자대호白磁大壺를 동체 중심에 이음새 없이 한 번에 제작하신다. 그날은 가마에서 숙성된 달 항아리를 꺼내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최초의 흙인 태토胎土를 선정하여 물레 위에 놓고 제작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인류의 경전들은 신을 도공으로 표현한다. 흙으로 창조되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상상한 최적의 창조신 모습이다. 도공은 정수와 함께 잘 갠 태토 덩어리를 받침대 위에 마련된 물레에 올려놓는다. 왼 손으로는 그 끝부분의 중앙을 지그시 눌러 그 전에는 없었던 공간을 만들어내고, 오른 손으론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도자기의 표면을 다듬는다. 양손모두 완벽한 예술의 첩경을 실행한다. 그(녀)는 감동적이며 쓸모가 있는 달 항아리를 만들기 위해, 군더더기를 제거한다.
왼손은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확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흙을 덜어내고 갈아낸다. 달항아리가 진흙으로 가득 차 있다면, 무거워서 이동할 수 없고, 소중한 물건을 담을 수도 없다. 그는 왼손으로는 비움을 연습한다. 비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다. 인간이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담기 위해서는,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도 집착했던, 더욱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犧牲해야한다. 오른손으론 자신의 겉모습을 무상하게 만들기 위해, 거친 진흙을 걷어낸다. 달 항아리가 ‘없음’을 담는다. 달 항아리는 자신이 담아야 할 ‘공허’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 없음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항아리 모양으로 규정하는 가치다.
고대 인도인들은 이 공허를 산스크리트어로 ‘순야’śūnya(शून्यत)라고 명명했다. ‘순야’는 그것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모체다. 바빌론 창조신화 <에누마엘리쉬>는 우주가 탄생하기 전, 혼돈을 상징하는 바다여신 티아맛Ti˒āmat 소개로 시작한다. 그녀의 별칭은 ‘뭄무’mummu다. 뭄무는 아카드어로 물건을 만들기 위한 주물鑄物이다. 이 주물이 질서와 모양을 갖춘 물건이 탄생할 수 없다. 물건은 이 주물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바빌로니아는 오래전부터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저 아르메니아 고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면서 가져온 침적토가 쌓여 구축된 땅이다. 바빌로니아에는 돌이 없다. 그들은 진흙으로 집을 건축하고 물건을 만들고, 토판을 다져 그 위에 글, 즉 쐐기문자를 기록하였다. 아카드어로 공방을 ‘비트 뭄무’bīt mummu, 즉 ‘주물의 집’이라고 불렀다. 순야는 만물을 생성하게 만드는 주물이다. 이 주물의 특징은 바로 빔이다.
순야를 숫자로 이해하자면 ‘제로’다. 제로는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을 이용하는 대상을 존재하게 만드는 신비한 매개체다. 예를 들어, 1과 10은 전혀 다르다. 0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 앞에 위치한 1을, 하나가 아니라 십으로 전환시킨다. 뺄셈은 제로가 만드는 기술이다. 4-5는 –1이다. 1과 –1사이에 제로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덧셈과 뺄셈의 산수가 작동하는 틀이다.
북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1170–1250)는 유럽에 십진법을 소개하고, 그 체계를 ‘제퓌룸’zephyrum이라고 명명하였다. 제퓌룸은 ‘제로’의 어원이 되었다. ‘제로’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이탈리아 방언 ‘제웨로’zevero와 ‘제피로’zefiro 축약형이다. ‘제피로’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서풍西風을 관장하는 신 ‘제퓌로스’다. 그리스신화에 의하면, 제피로스는 아폴로 신와 연적戀敵이었다 아폴로신이 미소년 히아킨토스와 함께 풀밭에서 고리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을 때, 태풍을 일으켜 그 고리를 히아킨토스 머리에 명중시켜 사망하게 만들었다. 아폴로신은 그 죽어지는 미소년을 참제비고깔larkspur 꽃으로 변신시켰다. ‘제로’는 원래 강력한 서풍으로 이전 것을 무효화하고 신비한 꽃을 만드는 도구다. 이탈리아어 ‘제피로’는 기원 7세기 메카를 중심으로 등장한 아랍어로는 ‘찌프르’ṣifr صفر로 음역되었다. ‘찌프르’는 ‘제로; 공허; 비움’이란 의미다.
산스크리트어 ‘순야’śūnya는 ‘공허空虛’이다. ‘순야’는 인간의 머리로는 떠올릴 수 없고 말로 만들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없음은 어떤 것도 나타나고 변화하고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을 상징하는 무한한 열린 공간이며 힘이다. ‘없음’은 한없는 부정을 통한 무한한 긍정이다. 공허의 기본적인 의미는 열림과 가능이다. 그 광대한 열림과 무한한 가능은 우리가 가진 숫자나 어휘를 넘어선 어떤 것으로이다. 아랍상인들이 인도의 제로개념을 유럽에 소개하였고 위에서 언급한 피보나치가 유럽에 십진법을 소개하였다. ‘순야’는 우주가 창조되기 전, 혼돈을 의미한다. <창세기> 1.2에 등장하는 ‘온 땅이 형태가 없었고 비어있었다’라는 문장에 등장한 무형과 공허다. 깊은 명상을 통해 인간이 지닌 모든 집착을 걷어내고 들어낼 때, 드러나는 얼어붙은 호수와 같은 광활한 공간이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지만 생명이 태어나기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달항아리를 만들기 위한 오른손은 울퉁불퉁 튀어나온 부분을 다듬는다. 항아리 전체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전체에 온전히 숨겨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왼손이 퍼서 덜어내는 작업이라면 왼손은 쳐서 매끈하게 다듬는 작업이다. 불가마니로 들어가 불과 바람의 신비한 기운으로 정해진 시간에 백자가 될 것이다. 인생이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은, ‘나’라는 물레위에서 자신의 개성을 지닌 형태제작이다. 그래야, 그 질그릇이 장작불로 뜨거워진 가마 안에서 신비한 색을 띤 달항아리로 부활할 것이다. 도야陶冶란 흙이란 재료로 달항아리와 같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첫 행위는 이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질그릇을 만들기 위해 절구질을 하여 태토를 만들고, 물레위에 무형의 진흙에서 과거의 습관들과 열망들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제거하는 작업이다.
하루는 흠모하는 자신을 만들기 위한 훈련이다. 훈련이란 새로운 습관의 취득으로, 과거의 나로, 주저앉히는 게으름과 욕심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1945년에 행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의에서 “존재存在는 본질本質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전 철학과 종교가 이데아 혹은 신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편의상 만든 ‘본질’에 매몰되었다고 진단하였다. 본질이라는 허상보다는 자의식을 통해 지금 자신이 만들려고 시도하는 가치와 의미가 더 중요하다. 본질은 내 존재가 구축할 변화무쌍한 조형물이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사르트르의 문장에서 존재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체-지-덕의 활동을 통해 새롭게 생성生成해야할 과업이다. 나는 내가 처한 환경을 자유롭게 변형시킬 수 있으며, 이 세상은 내가 선택한 자유의 정직한 거울일 뿐이다. 내가 두 손에 쥔 자유라는 정과 망치를 발휘하여, 자신에게도 생경하고 감동적인 ‘나’를 조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과거의 나’라는 환영이나 ‘타인이 보려는 나’로 전락하는 노예다. 인간은 자유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조각한다.
나는 사트르트의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생성은 존재보다 앞선다.”la devenir précède l'existence ‘존재’라는 단어가 주는 정적이며 수동적인 뉴앙스를 극복하기 위해선, ‘생성’이란 단어가 필요하다. 영어로 말하자만 to be가 아니라 to become이다. ‘생성’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한다. ‘존재’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지칭하지만, ‘생성’은 미래에 이우러진 자신을 전재하여, 현재 내가 가하고 있는 작업을 의식하게 만든다. 예들 들어, ‘나는 학자이다’와 ‘나는 학자가된다’는 전혀 다른 문장이다. 전자는 자신이 이미 학자라는 완벽한 상태를 구가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장은 건방지다. 그러나 ‘나는 학자가 된다’라는 말은, 나는 학자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추구하면서도, 현재 그것을 최선을 향해 추구한다는, 겸손, 희망, 열정 등이 숨겨져 있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제1권 ‘삼매’는 요가수련자가 요가수련을 위한 마음가짐을 설명했다면. 제2권 ‘훈련’은 요가수련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본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제2권 1행에서 요가수련자가 ‘삼매’에 도달하기 위한 생성의 과정으로 세 가지 방안을 소개한다.
첫째, 자신에게 엄격한 삶.
둘째, 자발적인 공부.
셋째 자신의 정한 신에 대한 헌신이다.
이 세 가지는 수련자가 매일 매일 반복해야할 긍정적이며 역동적인 가치들이다. 이 세 가지를 통해 그(녀)는 온전한 자신과 조우하는 삼매경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가 삼매경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방해물들을 제거해야한다.
그리스도교는 신자를 신을 만나기 위한 믿음과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혹을 ‘죄’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죄’의 근본적인 의미는 ‘길을 잃고 헤매다’ 혹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최적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다’라는 뜻이다. 고대 히브리어로 ‘하타’ḫātā(˒)와 그리스어 ‘하마르티아’hamartia 모두 ‘실수; 잘못; 죄’로 ‘자신이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하여 헤매다’란 뜻이다. 로마시대 신학자 어거스틴은 인류 죄의 기원을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과 소위 ‘선악과’ 이야기에서 찾았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원죄’ 개념을 창안하였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의도적으로 신에게 반항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죄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신을 ‘이슈바라’라고 불렀다. 요가수련자를 방해하는 ‘죄’는 그리스도교의 죄와 다르다. 그리스도교의 죄는 절대타자인 신에 대한 불순종이며 반항이지만, 힌두교의 죄는 개인의 심연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Atman을 발견하고 발휘하지 못할 때 생기는 무지의 상태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이 스스로 이슈바라가 되도록 수련하고, 자신의 몸, 정신, 그리고 영혼을 신적인 요소들로 차근차근 대치한다. 생성은 자기실현을 위한 과정이며,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이 되는 과정이 삼매경이다. 우리 대부분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획득되는 희소성의 상징인 부와 지위를 위해 일상을 바친다. 요가수련자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을 통해 생성이 가능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삶을 위해 자신과 경쟁한다. 그(녀)에겐 자신의 내적인 성장이 사회가 부여하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지위, 부, 인기보다 중요하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훈련편 2행에서 요가의 목적을 다름과 같이 말한다.
समाधिभावनार्थः क्लेश तनूकरणार्थश
samādhi-bhāvana-arthaḥ kleśa-tanū-karaṇa-arthaś-ca
사마디-바바나-아르타 클레샤-타누-카라나-아르타쉬-차
“요가 훈련의 목적은 자신의 심오한 내면에 몰입하는 ‘삼매경’을 생성生成하는 것이며
동시에 외부에 홀려 마음속에 생기는 번뇌들을 약화弱化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훈련경> 경구 2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의 목적을 ‘삼매경’이란 마음의 상태를, 자신의 마음속에 생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성’으로 번역한 산스크리트 단어 ‘바바나’bhāvana는 ‘되다’bhū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생성生成; 도야陶冶’란 의미다. 바바나는 본질이 아니다. 바바나는 나의 행위를 통해 내가 매일 매일 만들어야한, 인격도야이며 인격생성이다. ‘바바나’는 봄에 씨를 뿌린 농부의 심정이다. 농부는 그 씨가 싹을 틔우고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도록 항상 돌봐야한다. 그(녀)는 때때로 생기는 병충해를 제거하고, 열매를 맺는데,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그 자신이 삼매경으로 진입하려고 노력하면, 자연히 그의 마음속에 생기는 잡생각들은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매일 매일이 생성을 위한 구별된 노력이면 좋겠다.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