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8. (日曜日) “도법자연道法自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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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2021.11.28. (日曜日) “도법자연道法自然”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노자는 <도덕경> 25편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이 품어야할 ‘도’를 이렇게 말한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노자는 위문장에서 인간을 승화시키는 네 가지 요소를 언급한다. 땅, 하늘, 도, 그리고 자연이다. 위 문장의 핵심은 이것들을 이어주는 동사인 ‘법法’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달려있다. 학자들은 이 문장에서 ‘법’을 흔히 ‘본받다’로 해석하여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로 해석한다. 노자가 공자처럼, 어떤 정해진 법칙들, 즉 인의예지와 같은 가치를 유형의 가치로 결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무위를 덕으로 여기는 노자는 분명 ’법‘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법法’이란 한자는 물水이 자연스런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문구에서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이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도 타인과 다투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겸허謙虛가 몸에 배어 있어 언제나 낮을 곳으로 스스로 저절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흘러들어간다. 법은 물과 같은 몸가짐이며 활동이다. 위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인간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 뿐만 아니라, 지구의 동거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과 잘 어울려 산다.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이 가져오는 물, 공기, 햇빛을 흠뻑 받으면서, 주어진 짧은 수명을 살면서,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

저 하늘에 있는 해, 달, 그리고 모든 행성들은 지난 수억년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하염없이 갈 것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주가 운명하는 법칙은 도은 자연스럽다. 물과 같이 고요하게 만물을 이롭게 하면, 저 낮은 곳으로 조용하게 흘러간다.”

노자가 말한, 인간, 땅, 하늘, 그리고 도/자연을 자신의 유언비문에 남긴 왕이 있다. 인류 최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대왕(성서의 다리오왕)이다. 그는 낙쉐-루스탐(이란 남부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자신의 일생을 통해 가성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1. baga vazarka Auramazdā haya imām (바가 바짜르카 아우라마즈다 하야 이맘)

2. būmim adā haya avam asmānam (부밈 아다 하여 아밤 아스마남)

3. adā haya martiyam adā haya (아다 하야 마르티얌 아다 하야)

4. šiyātim adā martiyahayā (시야팀 아다 마르티야하야)

5. haya Dārayavaum xšāyaϑiyam akunauš (하야 다라야바움 흐샤야씨얌 아쿠나우쉬)

1. 아후라마즈다는 위대한 신이다. 그는

2. 이(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창조하였고, 저(높이 보이는) 하늘을

3. 창조하셨고, (순간을 사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4. 그런 인간을 위해 ‘행복’(조용)을 창조하셨다.

5. 그는 나 다리우스를 왕으로 삼으셨다,

이 비문에서 노자가 사용한 ‘법法’의 의미와 유사한 단어가 등장한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다’adā라는 동사다. 이 동사의 인도유럽어 어근은 *dh2eh로 ‘우주의 원칙에 따라 적재적소에 두다’라는 의미다. 창조創造란 무엇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행위다. 다리우스는, 노자가 언급한 네 가지 요소를 신이 네 가지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1) 우리가 발로 밟고 있는 이 땅(地), 2) 우리가 보고 있는 저 하늘(天), 3)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인간(人), 4) 그리고 ‘행복’(道法自然)이다. 인간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마르티야’martiya는 ‘죽는 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인식하는 동물인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모틀’mortal과 같은 어원이다. 인간만이 언제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산다. 그 인식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빛나게 만든다.

아후라마즈다는 순간을 사는 인간에게 ‘행복’이 담긴 초콜릿 상자를 주었다. 고대 페르시아 ‘시야팀’ (šiyātim/ 𐏁𐎡𐎹𐎠𐎫𐎡𐎶)의 의미는 ‘행복’이다. 시야팀은 인도-유럽어 어근 *kwyeə-에서 유래했다. *kw-가 인도-이란어에서는 sh-로 음운변화를 일으켜, 아베스티어(조로아스터경전언어)에서는 ‘샤이티-’(shaiti)로, 라틴어로는 ‘쿠이에스’quies, 즉 '조용'이 되었다. '사야팀'은 행복이며 조용히다.

자연은 조용이다. 조용은 우주와 자연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다. 조용할 때, 힘이 생기고 떠들 때, 힘이 빠진다.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는 E=mc2, 단테의 <신곡>, 밀튼의 <실락원>은 ‘조용’을 품인 인간들이 조각한 걸작이다. 태양주위를 공전하고 스스로 자전하는 지구는 소리가 없다. 자연은 언제나 침묵한다. 자녀를 기도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도 간절하게 조용하다. 빅뱅이 생겨나기 전 상태는 어떤 소리도 허락하지 않는 진공眞空이다. 진공 속에서 탄생하여, 우주를 만들고 그 안에 생물을 만든 것은 조용한 생각이다. 생각은 말이 없고 스스로를 더욱 간결하고 강력하게 다듬는다. 창조주, 발명가, 건축가, 작곡가, 작가, 기업가는 먼저 조용한 생각으로 구상構想하고, 그 청사진 위에 완벽하고 조화로운 부분들을 채워 넣는다. 생각의 특징은 조용이며, 조용의 유전자는 완벽과 조화다.

특정 종교나 철학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이 체계들을 주장한 성인들이나 성현들의 고귀한 삶에 대한 모독이다. 차라투스트라, 소크라테스, 노자, 마니, 예수, 루터, 갈릴레이와 같은 사람들은 전제나 진리를 자처하는 이전 집단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휘트먼은 인류의 유구한 문화유산인 종교와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Creeds and schools in abeyance,

Retiring back a while sufficed at what they are, but never forgotten,

I harbor for good or bad, I permit to speak at every hazard,

Nature without check with original energy.

교리와 학교는 휴지休止시키고

그들이 무엇이든 간에 만족하며 잠시 퇴거退去시키지만 결코 망각忘却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좋든 나쁘든 품습니다. 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원초적인 힘을 가지고 누구의 제지制止도 없이 ‘자연自然’을 품습니다.

종교와 학교, 혹은 그 한정된 집단에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리와 학설을 무조건 수용하지 말하고, 한 걸을 떨어져서 가만히 응시해야한다. ‘어베이언스abeyance’라는 단어는 법정용어로 최정 판결을 유보留保하고 일단 지쳐보는 과정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우연히 접한 학문들에 대한 태도는 ‘유보적’이어야한다. 인간은 부모를 통해 몸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고, 학교를 통해,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와는 다른 종교와 철학을 섭렵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취사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교육은, 사람을 진부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 서볼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가능한 유연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정신적으로 유연한 인간은 이제,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들 가운데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관(들)을 선택하기 전에, 휴지기간을 가져야한다. 그 휴지의 활동에 대한 설명이 “그들이 무엇이든 간에 만족하여 잠시 퇴거시키지만,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이다. 뉴톤의 말처럼, 인류는 이전에 혁신적인 사상과 체계의 발전을 시켜온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볼 때, 한 걸음 진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통념, 신념, 관습, 그리고 법보다는 자신의 안목, 영감, 자신의 습관, 그리고 양심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립>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Is it so bad, then, to be misunderstood? Pythagoras was misunderstood, and Socrates, and Jesus, and Luther, and Copernicus, and Galileo, and Newton, and every pure and wise spirit that ever took flesh. To be great is to be misunderstood.

“오해받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나쁩니까? 피타고라스가 오해받았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이 오해받았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모든 순결하고 지혜로운 영혼이 그랬습니다.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오해는 받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내가 해야 할 말을 한다. 그것이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에 세뇌된 타인의 눈에는 오해이며 신성모독이다. 내가 품어야할 마음씨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