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5. (木曜日) “말인末人”

사진

<술마시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유화, 1890, 59.4 cm x 73.4 cm

Art Institute of Chicago

2021.11.25. (木曜日) “말인末人”

인간은 변화를 감지하고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세월이 인간의 육체를 젊음에서 늙음으로, 자연스럽게 변화시킨다.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우연이라면, 세상을 마감하는 일은 필연이다. 인간은 이 필연을 숭고하게 만들기 위해, 정신과 영혼만은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미성숙한 정신이 어리석음이고 성숙한 정신이 현명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면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워 지혜롭게 되고, 과거의 경험을 초월하여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영적인 인간으로 승화한다.

인간은 이 훈련을 통해, 육체는 소멸해가지만, 정신과 영혼만은 새롭게 단련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깨달음을 통해, ‘그것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다. 인간은 과거의 잔재인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진 자신을 이 순간에 실천하는 존재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현재의 자신을 그리스도교 교리가 말하는 것처럼, ‘부인否認’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克服’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자신을 극복한 소수의 인간이 ‘초인超人’(Übermensch)으로, 과거의 자신에 굴복한 대부분의 인간이 ‘말인末人’(Letzter Mensch)이란 명칭으로 불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5에서 말인末人을 소개한다. 다음은 그 원문번역과 해설이다.


Als Zarathustra diese Worte gesprochen hatte, sahe er wieder das Volk an und schwieg. “Da stehen sie“, sprach er zu seinem Herzen, “da lachen sie: sie verstehen mich nicht, ich bin nicht der Mund für diese Ohren. Muss man ihnen erst die Ohren zerschlagen, dass sie lernen, mit den Augen hören? Muss man rasseln gleich Pauken und Busspredigern? Oder glauben sie nur dem Stammelnden?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군중들을 다시 보고 침묵하였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대고 말했다. “그들은 거기 서있다. 거기서 웃고 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귀들을 위한 입이 아니다.” 그들의 눈으로 듣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먼저 그들의 귀를 두드려 패야하나? 북이나 참회를 설교하는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혹은 말을 더듬는 사람의 말만 믿는가?


Sie haben Etwas, worauf sie stolz sind. Wie nennen sie es doch, was sie stolz macht? Bildung nennen sie’s, es zeichnet sie aus vor den Ziegenhirten. Drum hören sie ungern von sich das Wort “Verachtung“. So will ich denn zu ihrem Stolze reden. So will ich ihnen vom Verächtlichsten sprechen: das aber ist der letzte Mensch.

그들은 자신의 자랑스러워하는 어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어떻게 부르는가? 그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들을 염소치기들과 구별시킨다. 그러므로 그들에 관해 ‘경멸’이란 단어를 듣기 싫어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자긍심에 말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에 관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는 ‘말인’이다.


Und also sprach Zarathustra zum Volke: Es ist an der Zeit, dass der Mensch sich sein Ziel stecke. Es ist an der Zeit, dass der Mensch den Keim seiner höchsten Hoffnung pflanze. Noch ist sein Boden dazu reich genug. Aber dieser Boden wird einst arm und zahm sein, und kein hoher Baum wird mehr aus ihm wachsen können. Wehe! Es kommt die Zeit, wo der Mensch nicht mehr den Pfeil seiner Sehnsucht über den Menschen hinaus wirft, und die Sehne seines Bogens verlernt hat, zu schwirren!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군중에게 말했다: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수정할 시간이다. 인간이 가장 높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하는 시간이다. 그의 토양은 씨앗을 심기위해 충분히 비옥하다. 그러나 그 토양은 언젠가 메마르고 활력을 잃을 것이다. 더 이상 높은 나무가 자라날 수 없을 것이다. 아, 얼마나 슬픈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열망의 화살을 인간 너머 쏘지 못하고, 그의 활시위가 윙 소리를 내며 날리는 방법을 잊어버릴 것이다.”


Ich sage euch: man muss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ären zu können. Ich sage euch: ihr habt noch Chaos in euch. Wehe! Es kommt die Zeit, wo der Mensch keinen Stern mehr gebären wird. Wehe! Es kommt die Zeit des verächtlichsten Menschen, der sich selber nicht mehr verachten kann.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인간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혼돈을 자신 안에 품어야합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아, 얼마나 슬픈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가장 경멸한 인간들의 시대가 온다.”


Seht! Ich zeige euch den letzten Menschen. “Was ist Liebe? Was ist Schöpfung? Was ist Sehnsucht? Was ist Stern?“-so fragt der letzte Mensch und blinzelt. Die Erde ist dann klein geworden, und auf ihr hüpft der letzte Mensch, der Alles klein macht. Sein Geschlecht ist unaustilgbar, wie der Erdfloh; der letzte Mensch lebt am längsten. “Wir haben das Glück erfunden“-sagen die letzten Menschen und blinzeln.

“자 보십시오! 내가 그대들에게 말인을 보여주겠다. (그런 인간인 이런 말들을 자주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창조란 무엇입니까? 열망이란 무엇입니까? 별은 무엇입니까?” 말인은 이런 것들을 질문하고 눈을 깜빡입니다. 이때 대지는 하찮아지고 대지위에선 만물을 하찮게 만드는 말인이 날뜁니다. 이 종족은 벼룩과 같아서 멸종되지 않습니다. 말인(인류)가 가장 오래 남습니다. 말인들은 “우리가 행복을 발명해냈어!”라고 말하고 눈을 깜빡이며 망각한다.


Sie haben die Gegenden verlassen, wo es hart war zu leben: denn man braucht Wärme. Man liebt noch den Nachbar und reibt sich an ihm: denn man braucht Wärme. Krankwerden und Misstrauen-haben gilt ihnen sündhaft: man geht achtsam einher. Ein Thor, der noch über Steine oder Menschen stolpert! Ein wenig Gift ab und zu: das macht angenehme Träume. Und viel Gift zuletzt, zu einem angenehmen Sterben.

그들은 살기가 힘든 지방을 떠났다. 왜냐하면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몸을 부대낀다. 인간은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하는 것은 그들에게 죄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조심스럽게 걸어 다닌다. 돌이나 사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바보다. 때때로 취하는 소량의 독, 이것이 즐거운 꿈을 꾸게 만든다. 너무 많은 독은 즐거운 죽음이다.


Man arbeitet noch, denn Arbeit ist eine Unterhaltung. Aber man sorgt, dass die Unterhaltung nicht angreife. Man wird nicht mehr arm und reich: Beides ist zu beschwerlich. Wer will noch regieren? Wer noch gehorchen? Beides ist zu beschwerlich. Kein Hirt und Eine Heerde! Jeder will das Gleiche, Jeder ist gleich: wer anders fühlt, geht freiwillig in’s Irrenhaus.

그들은 아직도 일한다. 일은 일종의 오락이다. 그러나 오락이 그들의 몸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누구도 더 이상 가난해지지도 부유해지지도 않는다. 양쪽 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누가 아직도 지배하기를 원하는가? 누가 복종하는가? 양쪽 다 부담스럽다. 목자는 없고 짐승 떼만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것을 원하고 모든 사람은 똑같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진하여 정신병원으로 간다.


“Ehemals war alle Welt irre“ — sagen die Feinsten und blinzeln. Man ist klug und weiss Alles, was geschehn ist: so hat man kein Ende zu spotten. Man zankt sich noch, aber man versöhnt sich bald — sonst verdirbt es den Magen. Man hat sein Lüstchen für den Tag und sein Lüstchen für die Nacht: aber man ehrt die Gesundheit. “Wir haben das Glück erfunden“ — sagen die letzten Menschen und blinzeln. —

“예전에는 온 세상이 미쳤다”라고 가장 예민한 사람이 말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인다. 그들은 현명하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조소는 끝이 없다. 인간은 아직 다투지만 곧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위장이 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을 별로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건강을 존중한다. “우리는 행운을 발견했다”라고 말인은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Und hier endete die erste Rede Zarathustra’s, welche man auch “die Vorrede“ heisst: denn an dieser Stelle unterbrach ihn das Geschrei und die Lust der Menge. “Gieb uns diesen letzten Menschen, oh Zarathustra, — so riefen sie — mache uns zu diesen letzten Menschen! So schenken wir dir den Übermenschen!“ Und alles Volk jubelte und schnalzte mit der Zunge.

그 지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설교가 끝났다. 이것을 사람들이 ‘서문’이라고 부른다. 그때 군중의 고함소리와 환호가 그를 멈췄다. “우리에게 말인을 주십시오!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들은 소리질렀다. “우리를 말인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에게 ‘초인’을 선물로 주겠습니다.” 모든 군중들은 웃고 소리쳤다.


Zarathustra aber wurde traurig und sagte zu seinem Herzen: Sie verstehen mich nicht: ich bin nicht der Mund für diese Ohren. Zu lange wohl lebte ich im Gebirge, zu viel horchte ich auf Bäche und Bäume: nun rede ich ihnen gleich den Ziegenhirten. Unbewegt ist meine Seele und hell wie das Gebirge am Vormittag. Aber sie meinen, ich sei kalt und ein Spötter in furchtbaren Spässen. Und nun blicken sie mich an und lachen: und indem sie lachen, hassen sie mich noch. Es ist Eis in ihrem Lachen.


그러나 차라투스르타는 슬퍼 자신의 심장에 말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귀들을 위한 입이 아니다. 아마도 내 너무 오랫동안 산에 살면서 나무와 시냇물 소리를 지나치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 내가 저들에게 이야기할 때, 저들을 목자처럼 대했구나. 나의 영혼은 흔들지 않고 오전의 산처럼 밝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나를 무서운 농담을 일삼는 냉정하고 냉소적인 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나를 보고 비웃는다. 그들은 웃으면서 아직 나를 미워한다. 그들의 웃음에는 얼음이 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한없이 깊은 낭떠러지 위에 매단 밧줄에 비유한다. 밧줄 저쪽에는 인간이 추구해야할 ‘초인’Übermesch가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을 시도하는 밧줄 이쪽에는 인간이 탈출해야 할 ‘짐승’Tier가 있다. ASZ 서문 §5는 그 짐승이 누구인지 설명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초인을 선포하였으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고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그는 실의에 차, 실망의 침묵을 유지한다.

​그는 자신을 비웃는 군중들에게 자신의 말이 마이동풍이란 사실을 깨닫고 “그들이 눈으로 듣기 위해, 누군가 그들의 귀를 박살내야 만 하는가?”라고 중얼거린다. 이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눈으로 듣는 행위’에 대한 인용이자 적용이다. 다음은 구약성서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내용이다. 이사야는 저 높은 하늘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의 옷자락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 찬 것을 목격한다. 그는 천사들이 야훼신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 정도로 영적으로 깨인 상태가 되었다. 스랍이라고 불리는 천사가 제단에서 부집게도 훨훨 타고 있는 숯을 손에 들고 와 이사야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이 의식으로 이사야는 이제 자신의 말을 완전 연소시키고 신의 말을 전달하는 전령이 되었다.

​그가 눈들 들어 하늘을 보니, 저 높은 하늘에서 신들이 회의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 나는 말했다: ‘제가 여기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이사야서> 6.8) 그러자, 그(신)이 말했다: “너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라: ‘너희들은 진정으로 들었지만, 이해한 적이 없다. 너희들은 진정으로 보았지만, 깨달은 적이 없다.” (<이사야서> 6.9)

​신은 이스라엘인들의 그런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신은 이사야에게 유대인들의 회심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깨닫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הַשְׁמֵן֙ לֵב־הָעָ֣ם הַזֶּ֔ה וְאָזְנָ֥יו הַכְבֵּ֖ד וְעֵינָ֣יו הָשַׁ֑ע׃

פֶּן־יִרְאֶ֨ה בְעֵינָ֜יו וּבְאָזְנָ֣יו יִשְׁמָ֗ע וּלְבָבֹ֥ו יָבִ֛ין וָשָׁ֖ב וְרָ֥פָא לֹֽו

“너는 이 백성의 마음에 두텁게 만들어라.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고, 그들의 눈을 덥히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 분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여 고침을 받을까 봐 걱정이다.”

<이사야서> 6.10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이전 종교인들이나 지식인들과 구별한다. 그들은 소위 ’문화‘라는 장치를 통해 자신과 ’염소치기‘라고 불리는 일반인들과 구별한다. 그들은 문화를 향유하는 자들도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장 싫어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자존심에 센 자들을 가장 치욕스런 명칭으로 부른다. 바로 ’데 레츠테 멘쉬‘ der letzte Mensch, 즉 ’말인‘이다. 말인은 현재의 자신을 초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초월할 의지가 없는 자다. 그는 더 이상 열망의 화살을 ’윙‘하고 쏘지 않는 자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 그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말하는 진선미나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 설교하는 사후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보석을 심으려는 의지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에 옥토를 아직 소유하고 있으며, 그곳에 희망, 즉 초인이 되기 위해 자기극복이라는 보석을 심을 시간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천국에 관한 비유에서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라는 표현이 있다.


Ὁμοία ἐστὶ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θησαυρῷ κεκρυμμένῳ ἐν τῷ ἀγρῷ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마태복음> 13.34

​복음서 저자는 천국을 농부가 그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거름 냄새로 가득한 밭에 숨겨져 있는 보화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보화의 은닉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인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자신이 마음이 옥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곳에 희망이라는 씨앗, 즉 보화를 심으라고 촉구한다. 그 보화는 마치 씨앗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날 것이다. 그에게 천국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화초처럼 정성을 다해 키워야할 희망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격려의 말을 하고 나서, ASZ에서 가장 유명한 말을 한다.

Man muß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ären zu können.

“인간은 자신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허를 찌른다. 질서를 통해 빛나는 별과 천재성이 등장한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정반대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돈은 춤추는 별의 어머니다. 혼돈은 질서의 필요충분조건이다. 혼돈이 없다면, 질서가 존재할 수 없다. 혼돈을 인내로 견뎌내면, 그 적당한 시간에 빅뱅의 순간이 등장하고 별들이 등장하여 우주의 끝까지 팽창한다. 인간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잠시 올라간 인생이란 무대에서 멋들어지게 춤을 추기 위해서는, 남들이 정해놓은 질서라는 틀을 해체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별들이 더 이상 탄생하지 않는 이유로, 자신의 현재를 경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기경멸은 혼돈을 만들기 위해 준비이자 연습이다.

말인은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금방 그 질문의 내용을 까먹는다. 그는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무엇이 사랑입니까? 무엇이 창조입니까? 무엇이 열망입니까? 무엇이 별입니까?”라고 묻지만, 건성이다. 그는 지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파리처럼 눈을 껌뻑거리며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켜 줄 설탕 조각을 찾아 날라 다닌다. ‘눈을 깜박거린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블린쩰트’blinzelt는 현대인들의 ‘주의결핍장애’注意缺乏障碍을 상징한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 세상문화도 바뀌고, 현대인의 관심도 바뀐다. ‘블린쩰트’는 초인을 상징하는 ‘번개’라는 독일어 단어 ‘블리츠’Blitz와 언어유희 관계에 있다. 번개인 인간에게 영속적인 깨달음과 혜안을 주지만, 눈 깜빡은 흘러 가버리는 순간일 뿐이다.


​말인들이 사랑을 베풀지만, 사실은 그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부딛낌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목자가 없는 양 떼와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정신질환을 앓는 현대인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Kein Hirt und eine Herde! Jeder will das Gleiche,

jeder ist gleich: wer anders fühlt, geht freiwillig ins Irrenhaus.

“목자는 없고 양떼는 한 무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경고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습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으로 갑니다.”


이 문단은 <요한복음> 10.16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예수는 목자로 양떼를 이끈다. 양떼들은 한 무리로 자신의 목소리로 우리도 돌아온다.


καὶ γενήσεται μία ποίμνη, εἷς ποιμήν.

“그들은 한 목자와 함께 한 무리가 될 것이다.”


현대인들이 동일한 문화를 통해 한 무리가 되었지만, 목자가 없기때문에 쾌락을 찾아 밤낮으로 우왕좌왕 몰려다닌다. 도심에서 외줄타기 서커스를 보는 말종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는다. 그의 영혼은 아침 산맥처럼 고요하고 선명하다. 사람들은 그에게 냉소적이다. 나는 말종인가 초인을 위해 혼돈을 품고 있는가? 나는 고요하고 선명한 산 같은가? 아니면, 냉소적인 무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