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3. (火曜日) “멘토Mentor”

사진

<지옥의 제9환에 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프랑스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 (1832–1883)

유화, 1861, 315 cm x 450 cm

Musée municipal de Bourg-en-Bresse

2021.11.23. (火曜日) “멘토Mentor”

서양인들은 스승을 ‘멘토(mentor)’라고 부른다. ‘멘토’라는 영어단어는 1750년경부터 문학 작품에 등장해 오늘날까지 ‘스승, 조언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멘토’는 인도유럽어권에서 ‘생각하다’라는 의미인 ‘만(man)’의 사역형인 ‘멘(men)’에 ‘-하는 사람’이란 뜻의 어미인 tor를 첨가한 것이다. ‘멘토’를 직역하자면,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멘토는 ‘자기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성찰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순간을 사는 인간이 주위의 기대나 체면 때문에 부화뇌동하기 쉬운데, 멘토는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고 촉구하는 존재다. 멘토는 구체적인 사항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가 가야할 방향을 지시해주는 나침반이다.

멘토는 원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원정을 떠날 때, 아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친구였다. 아직도 유약한 텔레마코스는 더이상 자신에게 처한 딜레마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단한다. 그는 혼자서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으로 가 무시무시한 회색 파도에 손을 씻으며 의미심장하게 외친다. “아테네 여신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어제도 우리 집에 방문하셔서 행방이 묘연한 나의 아버지의 귀향에 관한 소식을 알기 위해 나에게 배를 타고 잿빛 심연 바다 위로 항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오디세이아> 2.262-4)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여신 아테네가 아버지 친구인 늙은 멘토로 변신해 말한다. “텔레마코스! 너에게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고귀한 용기가 스며있다면, 너는 바보도 비겁한 자도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말을 어긴 적도, 자신의 일을 미완성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찾아 나선다면, 너의 여정은 성공할 것이다.” 그 후,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안개가 자욱하고 큰 파도가 넘실대는 아드리안 바다로 나가 영웅 네스토의 섬 퓔로스와 영웅 메넬라우스의 섬 스파르타로 항해를 떠난다.

지옥으로 내려간 단테에게 멘토가 필요하다. 멘토는 우상이 아니라, 제자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다. 마라톤 선수의 훈련을 도와주는 코치이자 페이스메이커pace-maker다. 그(녀)는 곁에서 선수가 완주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다. 무시무시한 공간으로 들어간 단테에겐 멘토가 필요하다. 마침내 그런 멘토가 희미하게 등장한다. <인페르노> 제1곡 61-66행이다.


61 Mentre ch’i’ rovinava in basso loco,

62 dinanzi a li occhi mi si fu offerto

63 chi per lungo silenzio parea fioco.

61. 내가 파멸되어, 낮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62. 그곳에서, 내 눈앞에 누가 제공되었다(나타났다).

63. 그는 오랫동안 침묵하여 희미하게 된 자다.


64 Quando vidi costui nel gran diserto,

65 «Miserere di me», gridai a lui,

66 «qual che tu sii, od ombra od omo certo!».

64. 내가 이 광활한 사막 근처에서 보았을 때,

65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66 당신이 그림자든지 혹은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인간이 자기 되고 싶은 자기, 즉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할 때, 그것을 저해하는 방해꾼이 꼭 등장한다. 그것이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그(녀)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즉 사랑하는 것과 그것에 몰입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 마음가짐이 대담大膽이다. 대담은 사랑이 희구하는 연인이다. 대담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도 마음이 흔들지 않을, 완벽한 고요를 마음에 간직할 때 가능하다. 그런 고요는 한순간에 오기도 하지만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기에, 붙잡기 위해 수련해야한다.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몸에 훈습되어 있는지도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 있어서 유일한 시제는 흘러가 버린 과거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변할 수 있는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뿐이며, 현재의 다른 이름인 ‘지금’뿐이다. 미래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지금 나의 생각, 말, 그리고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지금 두려움에 사로 잡혀있다. 두려움이 그를 파멸시켜(rovinava) 다시 그가 거쳐 왔던 ‘낮은 곳으로’(in basso loco)로 되돌려 보낼려 한다. 이 장소는 ‘어두운 숲속’이다. 그 순간에 누군가 등장한다.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여 그 존재가 거의 사라진 ‘희미하게’(fioco)된 자다. 63행이 등장하는 chi per lungo silenzio parea fioco는 60행에 등장한 ‘공감각’Synesthesia적 표현인 ‘태양이 침묵하는 곳’(dove ’l sol tace)의 반복이다. 공감각은 일대일 관계를 요구하는 오감이 서로 섞여, 예를 들어 시각의 대상을 청각으로 표현하는 문학장치다. ‘오랫동안 침묵’하여 시각적으로 희미하게 되었다.

그가 외친 첫마디는 “내 영혼을 불쌍히 여기십시오!”(Miserere di me). 단테는 상대방이 그리스도교인이지 아닌지 구별하지도 않고, <시편> 51편에 등장하는 Miserer Domini로 시작하는 참회노래를 건낸다. 이 노래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지은 시다.


In finem. Psalmus David, cum venit ad eum Nathan propheta,

quando intravit ad Bethsabee.

Miserere mei, Deus, secundum magnam misericordiam tuam ;

et secundum multitudinem miserationum tuarum,

dele iniquitatem meam.

단테는 다윗의 심정을 지녔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그곳에 왜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하늘에 달려있는 태양이 자신을 인도하여 진리의 길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언덕 위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았지만, 그곳에는 출구가 없었다. 그 순간 역설적으로 초월transcendence을 보았다. 그것만이 자신이 처해있는 곤경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다. 그가 눈을 들어보니, 거기엔 세 마리 짐승이 있었다. 이것들은 죄를 상징하는 것인가? 이 동물들은 우리의 욕망들, 늑대, 사자, 표범이라는 육체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그런 후 사람인지 아니면 그림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어떤 존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자’를 만난다.

단테는 지금, 자신이 경험한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중세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차이의 땅’the land of dissimilitude, ‘다름의 땅’ the land of an unlikeness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과 그 물건이 상징하는 바는 다르다. 이것을 우리는 물건과 상징 혹은 기호라고 부른다. 물건을 그것 자체가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와 기호를 나타낸다. 후에 구조주의 선구자 소쉬르가 이것을 ‘표의’signifie와 ‘표식’signifiant이라고 구분하였다. 이 희미한 중간적인 존재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기원전 19년)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아래 로마제국의 이룩한 영광과 그 기원을 다른 대서사시 <아이네아스>의 저자다. 그는 트로이(일리온)의 함락, 아이네아스의 여정, 그리고 로마를 제국의 보금자리(106-8)로 정착시킨 과정을 기록하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길 안내자이자 동반자다. <연옥> 30편까지만 동행한다. 단테의 <지옥편>(특히 3편)은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아스> 6권에 기록한 지하세계 하강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 <연옥> (특히 22-22편)은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시인 Eclogues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희미한 존재가 단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67 Rispuosemi: «Non omo, omo già fui,

68 e li parenti miei furon lombardi,

69 mantoani per patrïa ambedui.

67 그의 대답이 나에게 왔다.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때 사람이었습니다.

68 그리고 내 부모는 롬바르디 출신입니다.

69 두 분 모두 만투아가 고향입니다.


70 Nacqui sub Iulio, ancor che fosse tardi,

71 e vissi a Roma sotto ’l buono Augusto

72 nel tempo de li dèi falsi e bugiardi.

70. 나는 줄리어스 카이사르 통치시절, 좀 늦게 태어났습니다.

71. 나는 로마에 훌륭한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시절에 살았습니다.

72. 그 때는 거짓되고 거짓말하는 신들의 시대입니다.


73 Poeta fui, e cantai di quel giusto

74 figliuol d’Anchise che venne di Troia,

75 poi che ’l superbo Ilión fu combusto.

73. 나는 시인입니다. 정의로운 사람을 노래했습니다.

74. 트로이로부터 항해해 나온 안키세스의 아들입니다.

75. 그 오만한 일리움(트로이)을 연소되었다.

이 중간자는 스스로를 “나는 (지금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한 때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소개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이 당시 롬바르디의 도시였던 만투아 출신이라고 말한다. 율리어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즉 베르길리우스가 25살에 살해당했다. 그는 아직 글을 쓰지 않았다기 때문에, “좀 늦게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인으로서 명성을 가져다 준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이다. 그 당시 신들이 ‘거짓되고 거짓말하는 신’이란 표현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 (2.2, 2.10, 2.29.1-2)에 종종 등장한다.


로마국가를 건설한 아이네아스는 ‘정의로운 왕’이다. <아이네이드> 1.544-45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Rex erat Aeneas nobis, quo iustior alter, nec pietate fuit, nec bello maior et armis “우리의 왕은 아이네아스였다. 그 누구도 그 보다 선행에 있어서 정의로운 사람은 없었다. 전쟁과 전투에 있어서 더 위대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오만한 트로이를 함락시킨 인물이다. <아이네이드> III.1-3은 다음과 같다:

1. Postquam res Asiae Priamique evertere gentem

2. immeritam visum Superis, ceciditque superbum

3. Ilium, et omnis humo fumat Neptunia Troia,

1. 아시아의 것들(힘)과 프리아모스의 염치가 없는 종속과 왕좌가,

2. 신들의 힘에 의해 버려졌다. 그 오만한

3. 트로이가 함락되었고 넵튠의 트로이가 불탔다.

자신이 누구인지 신분을 밝힌 멘토인 베르길리우스가 이제 단테를 이끌 것이다. 늑대와 사자를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단테에게 무슨 말을 건낼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