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궁술경연>
무명화가
유화, 19th century, 77.8 x 110.8 cm
워싱턴 국립미술관
2021.11.19. (金曜日) “경멸輕蔑”
니체의 말은 단언적이고 당혹스럽다. 그리고 전복적이다. 그는 친절한 말이나 아부가 아니라 경멸과 욕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당시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에서 경멸을 좋아하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Ich liebe die großen Verachtenden,
weil sie die großen Verehrenden sind und Pfeile der Sehnsucht nach dem andern Ufer.
Ich liebe die, welche nicht erst hinter den Sternen einen Grund suchen, unterzugehen und Opfer zu sein: sondern die sich der Erde opfern,
daß die Erde einst des Übermenschen werde.
(번역) 저는 위대한 경멸자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대한 찬양자들이며 다른 혜안을 갈망하는 화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별들이 아래로 내려가 희생제물이 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먼저 찾지 않고,
자기 자신이 이 땅에 희생제물이 된 자를 사랑합니다.
이 땅은 언젠가 초인에게 속할 것입니다.
(해설)
자신을 극복하길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은 기존 질서에서 해답을 찾지 않는다. 그 해답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이나 교리에 의존한다. 그런 의존은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개조시키기를 포기하는 직무유기다. 자신 안에서 행복한 삶의 해답을 찾으려는 인간은, 그(녀)가 속한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한다.
테베의 안티고네가 그랬고 로마의 세네카가 그랬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 법정에서 그리스인들의 신봉하는 신에 대한 불경죄와 새로운 사상으로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문란 죄로 독배를 마셔야했다. 예수는, 않보이는 신이 신아니라, 자신과 같이 평범한 인간도 신이 될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다 신성모독죄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죄로 십자가 처형당했다. 마르틴 루터는, 사제뿐만 아니라 누구나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만인사제설’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갈릴레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당시 최고의 과학을 뒤집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다. To be great is to be misunderstood. 즉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오해받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누가복음> 12장 51절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δοκεῖτε ὅτι εἰρήνην παρεγενόμην δοῦναι ἐν τῇ γῇ;
οὐχί,
λέγω ὑμῖν, ἀλλ’ ἢ διαμερισμόν.
“너희들은 내가 평화를 주러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분열(을 주러왔다.)”
‘위대한 경멸자’는 기존 질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평화’를 깨부순다. 그는 기꺼이 기존질서에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현미경으로 진단하고, 그것을 사분오열 분열시킨다. 예수가 그런 인물이다. 니체가 ‘경멸’이란 개념으로 사용한 단어가 그런 뜻이다. 대상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하하라는 뜻이 아니다. ‘경멸하다’라는 독일어 동사 ‘페어아크텐’verachten은 ‘대상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 낱낱이 심지어는 부정적으로 조하고 평가하다’라는 뜻이다. ‘경멸’은 법적 용어를 빌리자면,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이다. ‘저는 위대한 경멸자를 사랑합니다’라는 문장은 ‘저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인간을 위대한 인간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의미다. 위대한 경멸자는 탁상공론을 일삼는 이론가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의 별이 땅거미 아래로 내려간 이유를 이론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기꺼이 그 아래로 내려가 희생제물이 되는 자다. 우리는 인생의 진리를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자도 인간의 본성을 유가가 말하는 억지로 지어낸 공론인 인仁, 의義, 예禮에서 찾지 않고 일상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덕德에서 찾는다. <도덕경> 38장 후반부에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是以大丈夫 시이대장부
居其厚而不居其薄 거기후이불거기박
居其實而不居其華 거기실이부거기화
故去彼而取此 고거피이취차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아는 지성인인 대장부는
드러나지 않는 두터움에 머무르지, 겉으로 드러난 얄팍한 언행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의 실재에 머무르지 일시적인 겉모습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 사람은, 말이나 이론에 의거한 ‘저것’을 버리고,
진심을 담은 언행을 담은 ‘이것’만을 취한다.”
니체는 이미 서문 §3에서 ‘초인은 이 땅의 존재이유다Der Übermensch ist der Sinn der Erde’라고 선언하였다. 초인은 저 하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문제만을 다루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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