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다리위에 있는 소녀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유화, 1933-35
텍사스 포트워스 ‘킴벨 미술관’
2021.11.18. (木曜日) “교량橋梁”
야산에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등산길을 알리는 발자국 표식들이 사라졌다. 걸을 때마다 ‘서걱서걱’ 낙엽 밟는 소리에 공중의 새들이 노래로 반응하고 저 멀리서 우리의 발길을 감지한 고라니가 소스라치게 도망친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최적화된 경로는 A지점에서 내딛는 첫 발걸음에서 시작한다. 이 두 지점의 거리가 아무리 멀다할지라도, 이 첫 발걸음을 생략하고는,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다. 첫 발걸음은, 목적지로 인도하는 유일한 통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10년동안 산에 올라가 ‘영혼’과 ‘고독’을 만끽하였다고 전한다. 이제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태양으로부터 받는 영감을 사람들에게 줄 참이다. 그가 줄 선물은 자신에게 필요가 없는 물건을 구호품이 아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생명을 줄 것이다. 생명을 주는 행위가 ‘순교’다. 그가 산에서 내려와 숲으로 들어가 한 성자를 만났다. 성자는 인간을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완벽한 신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홀로 영위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성자가 말하는 신, 자신이 교리로 감금시킨 신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
그는 경계의 지역인 숲을 지나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도시’로 들어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외줄타기 광대의 묘기를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에게 ‘위버멘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위버멘쉬에 관한 이야기는 마이동풍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실제로 ‘위버멘쉬’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는, 외줄타기 광대의 공연으로 시작한다.
Zarathustra’s Vorrede 4
<Also Sprach Zarathustra> 서문 4
ZARATHUSTRA aber sahe das Volk an und wunderte sich. Dann sprach er also:
Der Mensch ist ein Seil, geknüpft zwischen Tier und Übermensch – ein Seil über einem Abgrunde. Ein gefährliches Hinüber, ein gefährliches Auf-dem-Wege, ein gefährliches Zurückblicken, ein gefährliches Schaudern und Stehenbleiben.
(번역)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밧줄입니다. 밧줄은 나락 위에 매달려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도중에 있는 것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무서워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해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위버멘쉬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이제 위버멘쉬에 대해 정의하지만, 이 문장은 또한 인간에 대한 정의다.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밧줄이다.” 인간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양쪽이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당기고 있는 밧줄이다. 한쪽은 찰스 다윈이 말한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의 속한 ‘짐승’이며 다른 한쪽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위버멘쉬’다. 이 삼단계구분은 전통적인 ‘신-인간-짐승’의 구분과 다르다. 신의 자리에 개선된 인간, 극복된 인간이 자리를 잡았다.
밧줄은 한번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나락 위에 놓여 있다. 인간은 하루라는 외줄을 타는 존재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진화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 원숭이로 전락하지만, 시선을 저 멀리에 고정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신뢰하면, 자신을 극복한 이상적인 인간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 외줄타기 광대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처음이자 마지막 발걸음이다. 자칫 잘못하면 죽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도 위험하고, 그 도상도 도중도, 혹은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것도 위험하다. 밧줄 위와 같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정신을 바싹 차려야할 위험이다.
Was groß ist am Menschen, das ist, daß er eine Brücke und kein Zweck ist:
was geliebt werden kann am Menschen, das ist, daß er ein Übergang und ein Untergang ist. Ich liebe die, welche nicht zu leben wissen, es sei denn als Untergehende,
denn es sind die Hinübergehenden.
(번역) 인간에게서 위대한 점은 그가 교량이지 목표지점이 아니란 점입니다.
인간에게서 사랑스러울 수 있는 점은 그가 ‘너머 가는 존재’이며, ‘아래로 가는 존재’란 사실입니다.
저는 ‘아래로 가기’이외에 다른 방식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머가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해설) 인생이란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에게 목적지는 그(녀)가 지금 딛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다. 이 한 발자국은 결승지점과 연결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도정은 그 자체가 목표 지점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 단락에서 위에서 언급한 ‘위험한 건거나기’(gefährliches Hinüber)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위험한 건너가기’는 인간 스스로에게 위대하고 타인들에게 사랑스럽다. 인간에게 위대한 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 즉 ‘지금hier’과 ‘여기nunc’에 몰입하여 최선을 경주하는 삶이다. ‘지금’과 ‘여기’는 저 보이지 않는 이데나나 천국이 아니라, 내가 매일 매일 연명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일상의 장소이며,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마라톤 선수의 거친 숨가뿜과 힘겹게 들어 올린 발이다.
니체는 위대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위대함이란 다리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다리’를 의미하는 독일어 ‘브뤼케’Brücke(영어 bridge)는 전형적인 게르만 어휘로 ‘흉흉한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로 들보를 대고 그 위에 길을 만든 다리’란 의미다. 위대함이란 사람들에게 결승점이나 목표지점을 알려주고 칭송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거센 물살을 거슬려 강바닥에 든든한 들보를 박고 그 위해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편히 지나다닐 수 있는 교랑橋梁을 만드는데 있다. 사람들은, 위대함을 그 목표지점Zweck에서 찾는다. 그가 그 지점에 오기까지 반칙이나 사기를 쳐도 상관이 없다. 그 결과가 과정을 용인하기 때문이다. 교량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사용하는 동물을 위해 존재하는 자비이고 친절이다. 위대함이란 그런 이타심으로 무장하여,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 발휘하는 카리스마다.
니체는 교량이 지니는 자비를 설명한다. 인간은 자비를 베푸는 인간, 즉 사랑스러워 질수 있다. 그가 사랑스러워 질수 있는 이유는, 타인이나 타생명의 입장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타생명, 동물이나 식물의 고통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경감하려는 진정한 마음씨가 그 사람을 매력이 있는 존재로 만든다. 그가 타존재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희로애락으로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교육이란 상상력 훈련을 통해 온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비를 자신의 삶의 유전자이며 원동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너머 가기Übergang’와 ‘아래로 가기Untergang ’를 수련해야한다. ‘너머가기’란 니체가 말한 이상적인 인간, 신적인 인간, 혹은 신을 구현하는 인간인 ‘위버멘쉬’Übermensch 즉, 현재의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쾌락을 일삼는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는 ‘극복하려는 인간’이 하는 일련의 행위를 ‘너머 가기’란 단어로 표시하였다.
자신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전형이 예수가 로마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한 유언에 등장한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자신과 같은 삶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렇게 말한다:
Τότε ὁ Ἰησοῦς εἶπεν τοῖς μαθηταῖς αὐτοῦ
Εἴ τις θέλει ὀπίσω μου ἐλθεῖν, ἀπαρνησάσθω ἑαυτὸν
καὶ ἀράτω τὸν σταυρὸν αὐτοῦ, καὶ ἀκολουθείτω μοι.
“그런 후,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만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고 싶다면,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그런 후에 나를 쫓아오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지 말고, 자신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예수와 같이 행동하려거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한다. <마태복음> 저자가 사용한 ‘헤아우톤’이란 그리스 단어는 3인칭 단수 재귀대명사로 ‘그 자신’himself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수 없다면, 그 주관적인 자신에 맹목적인 노예가 된다. 이 상태가 중독이다. 내가 내 자신을 3인칭으로 보기 시작하면, 객관적인 평가하는 시작하면, 구원이 시작된다. 그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펴, 그것을 부인하는 행위가 구원의 시작이다
그런 인간이 두 번째로 해야 할 임무가 있다. 자신의 십자가를 의연하게 걸머지는 일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십자가’를 의미하는 ‘스타우론σταυρὸν’은 로마시대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 위해 만든 말뚝이다. 범죄자의 손과 발은 대못을 사용하여 말뚝에 박혀 모든 사람들이 지켜 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전시된다. 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걸머지라고 당부했는가? 십자가는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는 그 사람의 존재이유다. 인간이 그런 삶의 이유를 찾는다면, 죽음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다. 이런 행위가 순교다.
십자가는 자신을 저 높은 하늘을 향해 다시 일으켜 세우는 행위의 상징이다. ‘스타우로스’는 ‘일으켜 세우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동사 ‘히스테미histemi’에서 파생되었다. 내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나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이기심에 중독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외부의 시선에 상관하지 말고, 심지어 타인의 질시, 미움, 혹은 환호를 넘어서 조용하게 걸머지고 정진해야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행위는 나를 극복하는 행위이자 나만의 심연으로 기꺼이 내려가 좌정하려는 포부다. 차라투스트라는 ‘아래로 내려가는 행위’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들만이 ‘너머 가는 인간’ 즉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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