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1. (木曜日, 315th) “자아自我”

사진


<금지된 재현>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유화, 1937, 81cm × 65cm

네덜란드 로테르담 보에이만스 판 뷔닝언 박물관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2021.11.11. (木曜日, 315th) “자아自我”

자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 경험으로 만들어진 거울 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나’와, 내가 간절과 진심으로 매일 매일 창조해 나갈 ‘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루를 시작하는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할 회초리다. 나는 과거의 나인가 아니만 내가 그런 과거를 기반으로 새롭게 구축해야할 나인가? 내가 찾아야 할 궁극적인 존재로서의 ‘나’가 별도로 존재하는가?

고대 인도인들은 자아를 표현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어 아트만을 사용한다. 아트만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하나는 첫 글자를 소문자로 표현한 ātman이고 다른 하나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현한 Ātman이다. 전자는 ‘나’라는 개별적인 인간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자아다. 그런 자아는 습지濕紙와 같아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히 만나는 먹물의 색깔에 따라 물든다. 소문자 아트만은 저 공중에 나부끼는 풍선처럼 비바람에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린다. 경험에 의해 정복당한 소문자 ‘아트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한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더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무식하다고 여긴다.

파탄잘리는 소멸 후 등장하는 마음의 관찰자와 본연의 모습에 대해 〈삼매경〉 3행에서 설명한다. 그는 요가의 목적이 본연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단테의 말을 빌리자면 ‘심연에 잠들어 있던 사랑으로 넘치는 영혼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도어에는 본연을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요가 수련자가 훈련을 통해 획득해야 할 궁극적인 의식의 상태를 일컫는 말들이다. 고대 인도 철학자들은 다음 세 가지 용어들을 이용하여 본연을 설명한다. 아트만, 푸루샤 그리고 파탄잘리가 사용한 단어 드라슈트르drastr가 그 용어다.

인도 철학은 그런 자아를 ‘지바 아트만jīva ātman’이라는 용어를 동원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지바 아트만은 단순하게 ‘지바’라고도 불린다. 동사 ‘지브jiv’는 ‘숨 쉬다’란 의미로 지바 아트만은 ‘숨 쉬는 존재’란 뜻이다. 지바 아트만과 유사한 개념을 고대 이스라엘의 경전에서 찾는다면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népeš hayyā(h)’가 있다. ‘네페쉬’란 말은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다. 이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용어다. ‘하야’는 ‘살아 움직이는’이란 뜻이다. 인간창조 이이기를 ‘네페쉬 하야’는 신이 ‘흙’(히브리어 ‘아담’)으로 모양만 갖춘 인간에게 숨을 코에 불어넣어 창조된 인간을 의미한다.

대문자 아트만 Ātman은 전혀 다르다. Ātman은 삼라만상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과 일치하는 ‘초월적인 자아’다. 현대인에게는 ātman과 Ātman,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를 선명히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둘을 의도적으로 구분했다. 《바가바드기타》 제6권 5~6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크리슈나는 초월적 자아Ātman’와 ‘경험적 자아ātman’를 두 행에 열세번이나 사용하면서 영웅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uddhared ātmanā-‘tmānaṁ

사람은 초월적 자아를 통해 경험적 자아를 들어 올려야 한다.

nātmānam avasādayet

사람은 그 초월적 자아를 타락시키면 안 된다.

ātmāiva hyātmano bandhur

왜냐하면 초월적 자아만이 경험적 자아의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ātmāiva ripur ātmanaḥ

초월적 자아만이 경험적 자아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bandhur ātmā-‘tmanas tasya

초월적 자아는 경험적 자아의 친구다.

yenātmāivātmanā jitaḥ

만일 경험적 자아가 초월적 자아에 의해 정복당한다면!

anātmanas tu śhatrutve

그러나 만일 경험적 자아가 적이 되지 않는다면

vartetātmāiva śhatruvat

초월적 자아는 진실로 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인간의 경험적인 자아는 초월적인 자아에 의해 정복당해, 친구가 되어야한다. 친구가 된다는 말은, 자아가 추구하려는 최선의 단계인 우주와 합일된 자아가 일상의 자아, 경험적 자아를 정복하여 깨어난 자아로 합일되는 상태다. 만일 내가 초월적 자아에 의해 정복당하면 나는 그 자아와 친구가 되어 승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경험적 자아에 사로잡히면 나는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이렇듯 우리 마음속에서는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가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삶이란 경험적 자아를 가만히 보고 취사선택하여, 초월적 자아와의 합일을 시도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