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책 중 쉬어가는 청평 호수 근처 바위에 올랐다. 가을의 한 복판에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개가 자욱하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안개는 무엇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자신이 금방 없어져도, 그 순간에 몰입할 뿐이다. 안개는 자유自由다.
<신약성서>의 요한복음 저자는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진리가 무엇이길래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가? 진리가 인간이 수고를 통해 획득하여 체득해야할 예술이라면, 그 예술의 표현은 자유다. 인간은 언제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가? 인간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사방에서 홍수처럼 말려오는 잡념과 잡담으로, 그만 자신이 되지 못하고, 외부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로봇가 되고 만다. 인류가 여태까지 발견한 최고의 작품이자 로봇인 AI는 인간이 애써 이룬 진리라는 왕좌를 탈취하였다. AI는 인간들에게 자유를 선택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자신이 정의한 자유를 강요할 것이다.
진리는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어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라는 표주박으로 떠 올린 생수生水다. 만일 누군가 그 진리의 내용을 독점하고, 다수에게 그 진리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비-진리이며 폭력이다. 현대인들을 마음을 메마르게 하는 것은, 개인에게 깊은 묵상의 여유를 허용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친절한 진리’를 생산하도록 여유를 주지 않는 성급함이다. 과거에는 사상과 교리가 인간의 정신을 메마르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쉴 새 없이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뉴스가 현대인의 영혼을 고갈시킨다.
진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대로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추상’으로 현재를 규정하는 ‘알레쎄아아’ 즉 ‘망각할 수(레쎄이아) 없는(알) 어떤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아름다운 꽃’보다 실재이며 더 아름다운가? 누가 이 아름다운 꽃을 아름답다고 정의할 수 있는가? 인류는 최근 아름다움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은 아름다움이 왜 관찰자의 눈에 있는지 그 이유를 가름할 수 없다. 진리는 삶의 우여곡절을 통해, 가장 가치가 있고 숭고하다고 여겨진 어떤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에게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일 수 밖에 없다.
니체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를 빌리자면, 독일어 ‘에트바스’etwas다. 그것은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문구인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에서 ‘타트’ 즉 3인칭 대명사인 ‘그것’에 해당한다. ‘어떤 것’이나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슬며시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다. 안개는 분명히 존재하나, 조금 있다가 사라진다. 진리는, 매 순간 정신 차림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살포시 보여준다.
진리를 고대 히브리어에서 찾으면, 그 실마리가 보인다. ‘진리’는 ‘에메쓰’emet(h)다. 에메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히브리어가 속한 셈족어를 언어학적으로 재구성하여 원-셈족어Proto-Semitic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의미를 축출할 수 있다.
*ʾamin-‘믿다’ + ta (추상명사를 만드는 여성형 어미) > **ʾamitta(자음동화) > **ʾamitt (마지막 단모음 생략) > **ʾamit (마지막 이중 자음 간소화) > **ʾamt (엑센트 없는 모음 생략) > ʾĕmet (אמת)
히브리어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인 ‘에메트’는 ‘믿음’ 혹은 ‘신뢰’다. 믿음은, 자기 생각이나 남들이 일방적으로 알려 주는 지식에 매달리는 아집이나 맹신이 아니라, 깊은 사고를 통해, 깨달은 삶의 원칙이다. 그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진리에 열려져 있고 다른 진리에 친절하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진리가 닫힌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잠재력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사람의 심오한 믿음으로, 다른 믿음에 겸손하게 열려있고, 미래의 진리를 준비하여 스스로 허물 준비가 되어있어 겸허하다.
그런 진리를 품은 사람은 무엇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유自由다. 자유는 스스로가 존재이유가 되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중 자유롭지 못한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자유는 수단이자 목적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과정이다. 자유는 존재being가 아니라 생성becoming이다. 자신이 존재being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것을 결국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오는coming는 깨달음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기꺼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한 부분이나 부품으로 전락한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고 부품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계를 위한 밥벌이를 시작하면서 자유는 사회 안에서 심리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와 얽히면서 그 본질을 상실하였다.
우리가 적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자유에 승복하는 이유는,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불신은 감정적이며 정신적인 소외를 초래하고, 누군가와 연결하여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진다. 에머슨은 인간이 자기신뢰를 하지 못하는 경우, 남을 부러워하고 흉내를 내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는 부러움이야말로 무식이고 흉내야말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살행위하고 토로한다.
‘자유로운’이란 영어단어 free는 원-인도유럽어 어근에서 그 의미를 추적할 수 있다. 원-인도유럽어 ‘프리야’*priya는 ‘사랑스러운’이란 의미로, 그 어근은 *프리pri-즉 ‘사랑하다’라는 의미다. ‘자유롭다’라는 말은 자신을 신뢰하여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가치를 찾을 때, 그(녀)는 두려운 것이 없고 부러운 것이 없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는 자신이 원하는 숭고한 한 가지를 위해 순교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인가? 나는 나를 깊이 신뢰하고 있는가? 나는 저 안개처럼, 이 순간을 사랑하는가? 나는 어떤 것과 사랑에 빠져있는가?
사진
<청평 호수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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