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9. (火曜日) “within(2)”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현자들은 그것을 욕망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인간을 희구하고 열망하게 만드나? 인간은 어떤 대상에 처음부터 매료될 수 없다. 그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여, 매력이 있다고 판단한 후, 그의 기억에 남아 그를 사로잡는 중앙제어장치가 된다. 인간이 무모하게 아드레날린을 유발을 시키는 위험을 서슴지 않고 행동에 옮긴다. 위대한 시인 W.H. 아우덴과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4세기 로마 시대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인류의 최초 심리학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프로이트와 융이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만들기 이전에, 인간 마음의 작동에 관해 깊이 관찰을 글로 남겼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인 ‘원죄’라는 교리를 마련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론> 2권에서 자신이 십 대에 저지른 비행 한 가지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서구 역사에서 사회학자, 철학자, 혹은 시인들에 의해 ‘죄책감’ 혹은 ‘반항’을 설명하는 기반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들과 함께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문란한 생활을 하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훼손하는 ‘파괴자들’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잘 익은 배가 주렁주렁 달린 배나무를 한 집에서 보았다. 평범한 배들이었다. 그들은 배들을 서리하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청소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배를 모두 따버렸다. 우리가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한입 베어 먹고는, 전부를 돼지들에게 던져주었다.

이런 행위가 우리를 흥분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내 마음에서 나왔다. 오, 신이시여!

이런 행위는 내 마음에서 나왔다. 오, 당신은 바닥이 없는 구멍에서조차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런 행위에서 의도한 것은,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방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입니다.

내가 악의 꿰임이 빠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악 자체를 즐기려는 성향 때문입니다.”

40대 중반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절도사건을 회고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분명 배를 서리하고 먹길 원하지 않았다. 배가 자신의 소유라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배를 서리한 이유는 절도라는 악 자체가 주는 짜릿함 때문이다. 그가 배들을 돼지들에 아무런 이유 없이 던져준다. 인간에겐 자신의 양심을 거역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우구스투누스는 그 욕망 자체가, 대상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순간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것은 더러운 행위였고 나는 그것을 사랑했다.

나는 타락하기를 사랑한다.

나의 실수를 사랑한다. 그것은 내가 우연히 실수한 것이 아니라

실수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을 한 것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도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들과 배고프지도 않고 자신의 집에 더 좋은 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집에서 배를 훔쳤다. 그는 자신을 삶을 통해 이 행위를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젊은 패기로 저지른 실수를 가지고 ‘원죄’라는 교리를 만들어 낸 아우구스티누스를 소심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사소한 잘못을 찾아내 자신에게 ‘고해성사’를 요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발견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그런 비행을 즐거워하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구스티누스가 말한, 이기심과 쾌락을 사랑하는 본능을 가만히 응시하여 제어하지 않는다면, 그 욕망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인간을 조절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런 행위를 좋아하는 성향을 응시하고 제거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다가 친구들과 함께 교외 카시키아움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면서 사막의 교부들에 관한 책을 읽는다. 이런 장소에서 글을 읽고 지내는 것은 로마 귀족들의 취미로 ‘오티움 오네스툼’otium honestum 즉 ‘숭고한 여가’라고 불렸다. 그는 이 곳에서 자신의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회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시절 저질렀던 철없은 행위의 동기를 찾으려 했다. 그는 분명 <창세기>에 등장한 선악과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싶었다:

<성서>

인류의 타락: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인류의 구원: 예수가 못이 박힌 십자가 나무

<고백론>

아우구스티누스의 타락: 고향 타케스타의 배 나무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 카시키아움 별장의 무화과 나무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그런 비행을 즐거워하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구스티누스가 말한, 이기심과 쾌락을 사랑하는 본능을 가만히 응시하여 제어하지 않는다면, 그 욕망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인간을 조절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런 행위를 좋아하는 성향을 응시하고 제거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명상은, 자신이 저지를 잘못해 대한 헤아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흔적을 남긴 성향까지 파악하는 섬세하게 보는 관조다. 파탄잘 리가 <요가수트라>에 서 말한 명상으로, 그 대상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무상관조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그곳에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감지할 수 있다. 그 단계로 내려가는 방법을 공부하고 싶다.

사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프라 안젤리코 (1395-1455)

패널위 템페라, 1430, 21.8 cm

토마 장리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