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8. (月曜日) “within(1)”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갈대들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안개가 자옥한 산책길에 청평 호수에서 흘러들어온 개울들이 갈대와 잡초와 우거져 안셀름 키퍼로 울고 갈 예술작품을 무심하게 연출한다. 예술의 원천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미메시스’mimesis다. 그것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작업은 ‘흉내’지만, 자신의 삶의 언어로 풀어내면 ‘재현’이다.

매순간 변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니 자신이 변화하는지도 인식하지 않는 저 풀들은 진정 영감의 원칙이다. 요즘 초월주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메슨이 자신의 에세이 모음집을 Nature로, 시인 월트 휘트먼이 자신의 시집을 Leaves of Grass, 그리고 데이빗 헨리 소로가 Walden Pond로 명명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우리는 잡초라고 부르지만, 풀들은, 아니 인간을 제외한 만물들은 언제나 최선을 드러낸다. 인간은 사진 앞에서 억지로 미소를 짓고 손가락을 올려 이상한 모형을 어색하게 만들지만,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저 풀잎들은, 언제, 어디서나 베스트 샷이다. 심지어는 누가 와서 자신의 줄기를 꺾어도, 혹은 불을 질러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풀잎들은 언제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기에 순수하고, 자연에 순리하기 때문에 지혜롭고, 보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자비롭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사랑스럽다. 이 잡초의 특징은 ‘위드인’within이라는 이상한 영어 전치사이자 부사로 표현할 수 있다.

with는 인간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행복하다고 착각을 담고 있다. 친구가 사는 집, 유명한 사람들이 자랑하는 명성, 혹은 이 시대의 천재라고 우상화한 부자들의 부를 자신도 소유해야, 비로소 만족할 것이라고 교육받아왔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깨끗한 옷을 입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주위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 부자이며 권력자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자신의 삶의 통해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누구를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한 사상이나 종교는 재미가 없고 가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with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전치사 in는 내 몸, 내 생각, 그리고 내 노력의 범주 안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표시한다.

행복이란 영어단어인 ‘해피니스’happiness는 ‘우연히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 ‘해브닝’happening과 같은 어원에서 왔다. 눈이 먼 사람에겐 우연인 흘러가버리는 허무함이자 아쉬움이지만, 눈을 뜨고 자신의 삶을 깊이 보는 사람에겐, 그 우연은, 자신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그 우연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 당겨, 순간을 영원한 행복으로 매 순간 변모시키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다르다. ‘다름’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과 같은 인간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든 허상들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궁극의 성배다.

‘다름’은 일상을 자세히 사선斜線으로 보는 시선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사선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경험으로 나름대로, 그 기준으로 외부를 보려는 용기다. 그 용기가 있는 시선만이 옳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시선을 갈망하고 발견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발견한다면 신뢰했는가에 달려있다. 인류의 성현들을 그 다름을 ‘거룩’이라고 말했다. 유대교인들은 신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면서, 밤과 낮으로 구성된 하루를 구별하였고, 제 7일째 되는 날, 지난 6일 동안 하던 일을 강제로 멈추고, 그 날을 구별하였다. 이 구별이 거룩이다.

그런 구별된 삶을 살려고 결심한 사람은 within이 아닌 것들에 경도되지 않는다. 겉모습, 소문, 험담, 허영, 허상은 이 결심 앞에서 추수하는 농부가 날리는 쭉정이처럼 바람에 날라가 버린다. 그 결심은 저 하늘에서 언제나 나를 축복하는 태양 광선과 같이 모든 무상한 현혹들을 꿰뚫어 버린다. 이 결심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촉구하고 격려한다. 그는 최선을 경주하면 매 순간 사는 방법을 배울 것이며, 그렇게 살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전에 그의 주인이던 이기심으로 중독된 욕망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남들의 소문이나 의견에 흔들리던 조그만 나룻배가 더 이상 아니다. 그는 더 이상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 견해, 혹은 교리의 신봉자가 아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의 중심을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 즉 ‘위드인’within에서 발견하고 기뻐한다. 나는 그 중심을 어디에서 찾는가?

사진

<청평 호수 개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