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에는 순서가 있다. 그 시작은 언제나 처음이가 마지막은 언제나 끝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에겐 탄생이 시작이고 육체의 소멸인 죽음이 끝이다. 2021년이란 시간은 달리기다. 지나고 보면 순간으로 끝나는 단거리이고 결승점을 향해 숨이 가쁘게 달리고 있는 선수에겐 중거리이자 수고이며,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인간에겐 마라톤이다. 마라톤 결승점은, 20km와 30km에 반드시 찾아오는 자신의 일상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불가능한 마의 구간이기 때문이다.
동물이었던 인간이 인간 모습을 갖춘 이족보행을 하게 되면서 생존을 위해 ‘호모 쿠란스’homo currans가 되었다. 오래달리기 위해 몸에서 털을 제거하여 땀을 온몸을 통해 배출하여 체내온도를 조절한다. 온혈 포유류는 체내온다고 3도정도 올라가면 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죽기마련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오래달리는 것인 생존전략이었고 오래 달리기 위해 ‘엔돌핀endorphin’이라는 신경분비물을 배출하도록 진화해 왔다. 엔돌핀은 마약을 하거나 섹스를 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소위 ‘하이’high를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아프리카의 칼리하리 부족은 평원에 남긴 사슴과 같은 사냥감의 발자국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100m를 6초에 돌파하는 사슴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나 온 몰이 털로 덮인 사슴을 체내온도를 낮추기 위해 숨을 고르며 쉴 수밖에 없다. 사냥꾼은 1시간이상 달리면서 엔돌핀으로 도움을 받아 지쳐 쉬고 있는 사슴을 잡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1970년대, 인간의 체내에 등장하는 이 화학성분을 ‘엔돌핀’이라고 불렀다.
엔돌핀은 그리스어 ‘엔도게누스’endogenus와 ‘몰핀’morphin의 합성어다. 엔도게누스은 ‘안endo에서 생겨난genus’이란 뜻이다. ‘몰핀’은 잠을 유도하는 약물이지만, 원래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란 작품에 등장하는 ‘꿈의 신’인 모르페우스Morpheus에서 유래했다 ‘모르페우스’의 어원을 다시 분석하면 ‘완벽한 형태; 모양; 아름다움; 겉모습’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르페’morphē에서 조어된 단어다. 엔돌핀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발휘하기 위해 한계를 경험하는 훈련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김없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마라톤으로 뛰지 않고 대개 방황한다. 방황이 자신만의 결승점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면, 그 방황은 가치가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뛰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고 대답할까?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뛰니까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그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목적지가 정말 나에게 어울리는 목적지인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기를, 사회가 정한 획일적인 ‘교재’를 이용하여 똑같은 내용을 야만적으로 암기하고 매정한 평가를 통해 공장의 물건처럼 생산된 인간에겐 목적지가 진부하고 구태의연하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직업에 만족도가 높을 일이 없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제로-섬게임의 승자는 이미 사회가 요구하는 꼭두각시로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의 목표는 달려가면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자신이 성과를 내면 낼수록, 그 목표지점을 더욱 멀어지고 자괴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서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성과를 내고 명성, 부, 그리고 권력을 쥔 사람이 자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내재적인 엔돌핀이 없다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공허하고 불안하다. 그 보다 더 많은 명성, 부, 그리고 권력을 지닌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일등주의에 중독된 인간은 더욱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행복과 만족이란, 자신만의 엔돌핀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정성스럽고 사적인 수고다. 그것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환호하는 그런 성과일 필요가 없다. 오늘 내가 목표를 상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안달할 필요가 없다. 목표는, 지금 내가 그것을 향해 의연하게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서신서 중에서 빼어난 글로 정평이 나있다. 당시 박해를 받고 있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란을 참고 견디라는 격려의 내용이다.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11.8에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Πίστει καλούμενος Ἀβραὰμ ὑπήκουσεν ἐξελθεῖν
εἰς τόπον ὃν ἤμελλεν λαμβάνειν εἰς κληρονομίαν,
καὶ ἐξῆλθεν μὴ ἐπιστάμενος ποῦ ἔρχεται.
באמונה שמע אברהם כאשר נקרא ללכת אל הארץ אשר יירשנה
ויצא ולא ידע אנה יבוא׃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미래에 유산으로 물려받을 장소로 나가보라고 불렸을 때, 순종하고 떠났다.
더욱이 그는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자신이 편하게 살던 우르에서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여기서 믿음이란 누구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세하게 침묵의 소리를 말하는 신의 목소리,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였다. 그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몰입인 인간을 구원한다. 미래의 유산은 사실 말뿐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몸으로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심연에서 만들어낸 천상의 궁궐이기 때문이다. 그 궁궐을 발견한 사람은, 순명한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을 유기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남들은 그가 목적지도 모르고 달기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그를 비웃는다. 그에게 목적지는 지금只今이며, 지금은 목적지로 연결되는 유일한 시간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목적지는 여기인가? 나에게 환희의 순간은 지금인가? 나는 인생이란 마라톤을 뛸 나만의 엔돌핀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드가의 14세 소녀처럼, 나의 내재적인 힘을 믿는가?
사진
<14세 댄서>
프랑스 화각-조각가 에드가 드가 (1834-1917)
청동 조각, 1881, 98.9 × 34.7 × 35.2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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