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 말은 입을 통해 습관적으로 주절거리는 잡음雜音이 아니라, 빅뱅을 가능하게 한 천지개벽의 울림이며, 만물을 생존하게 만드는 격려이자,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을 마치고 ‘다 이루었다’라고 십자가 위에서 던진 예수의 안도의 탄성歎聲이다. 고대 히브리 예언자들은 그 말을 ‘다바르’dabar라고 불렀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라고 명명하였다. 갠지스 강의 시인들은 ‘다르마’dharma로 이 말을 가슴에 품었고 중국인들은 ‘언’이라고 여겨, 입으로 나오는 소리로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감동적인 사건이 되어야한다고 여겨, 그 말을 ‘다바르’라고 불렀다. 이 단어에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서로 배태적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이란 의미도 지니고 그 말이 실행된 ‘사건’이란 뜻도 있다. 말이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여 악이다.
야만적인 사람은 자신의 던진 말의 결과를 헤아릴 수 여가가 없을 정도로 어리석어,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이념과 편견에 사로 잡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주위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악취가 나는 험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에 열광하는 한쪽 편에 환호성에 도취된다. 진리는 이쪽에도 옳고 저쪽에도 옳은 중간中間이다.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 문장은 옳다. 언제나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그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의 특징은 침묵이다. 하늘에서 만들어진 침묵은 침묵을 수련하는 인간을 통해 감동적인 웅변으로 등장한다.
침묵을 통해 단련된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 말은 자연스럽고 찬란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말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마르’amar의 본래의미는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게 만들다’란 의미다. 히브리어에서는 그 의미가 사라졌으나, 히브리어 보다 훨씬 오래된 언어인 아카드어(기원전 24세기에 등장)에서는 ‘드러나서 눈으로 확인하다’라는 뜻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첫 구절 “샤 나뜨바 이무루‘sha naqba īmuru의 뜻은 ‘심연을 말한 자’가 아니라 ‘심연을 본 자’라는 뜻이다. ‘이무루’는 아카드어로 ‘보다’라는 동사 ‘아마루’에서 파생했다. 말은 자신의 침묵이 만들어난 보석이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 있다. 로고스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문법이다. 말과 글을 잘 사용하는 사람은 문법을 숙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자다. 배우지 않는 사람에겐 문법이 중요하지 않다.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부로 쓰는 언행이 다듬어지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그(녀)가 누구로부터 지적받아 자신의 잘못을 수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법이란 이타심에서 나온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로고스는 우리의 삶에 등장하여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한다.
2세기 초 예수라는 청년의 구별된 삶에 감동을 받은 한 지식인이 철학적인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로고스는 피안의 세계에서 훈수만 놓은 원칙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고위한 문법으로 움직이는 에너지다. 로고스는 하늘은 땅이며 신은 인간이고 위는 아랫니며 좌는 우라는 ‘신비한 합일’을 노래한다. 자신의 우연한 경험을 기초한 생각은 타인을 부정하는 구별을 만들지만, 로고스를 통한 새로운 안목은 타인을 나의 일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타인이 바로 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구별된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인도 르시rshi들은 말을 ‘다르마dharma’라고 불렀다. ‘다르마’란 산스크리트 단어는 중국으로 건너가 ‘법法’으로 번역되었다. ‘법’은 한 사회의 유지를 위한 법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한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이치이자 도리다. 法자는 水(물 수)와 去(갈 거)자가 만나 만들어졌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우주와 그 안에서 잠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에겐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양극이 항상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만물의 흐림을 깨달은 솔로몬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엔 다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습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인생이라는 예술작품을 조각하기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정성스럽게 움직이는 조각가의 손길이다. 2021년은 나무와 같다. 나는 이 나무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목수다. 훌륭한 목수가 나무를 가지고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나는 말과 글을 가지고 무엇을 창조해 낼 것인가? 나는 말을 통해 오랜 침묵과 묵상을 통해 만들어낸 자비, 지혜, 인내, 몰입, 배려를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과거처럼, 습관적으로 이기심적인 말을 내뱉을 것인가?
사진
<편지를 읽는 이다(해머쇠이 부인)>
덴마크 화가 빌헤름 해머쇠이 (1864–1916)
유화, 1899, 59 × 66 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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