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7.(月曜日) “응시凝視”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응시의 마술사다. 자신이 관찰한 대상의 핵심을 간파하여,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진흙이나 청동을 구부려 작업한다. 응시는 가만히 인내를 가지고 대상을 보는 수련이다. 이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잠시라도 그 대상을 응시할 수 없다. 그것은 인내와 수련이 필요한 덕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가, 수련하지 않고 응시한다면, 그것은 감정에 휩싸인 잠시이거나 멍을 때는 중일 것이다.

자코메티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다. 자기 자신을 실험한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1922년 1월 9일 고향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한 스탐파를 떠나 예술의 중심인 파리로 이주하였다. 고향 스탐파는 예술을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가르쳐준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와 자신에게 개신교 신앙의 엄격함을 보여준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그는 임시치아로 자신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알을 깨고 나온 새끼 거북이처럼 망망대해와 같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자신을 위한 최선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와서 경험해야할 ‘거룩한’ 도시다. 파리는 19세기까지 진행되던 ‘근대’近代라는 조각을 정과 망치고 과감하게 부시고 20세기라는 ‘현대’現代를 조금씩 만들어갔다.

‘현대’를 정의한 세 명이 명이 있다. 이들은 ‘과거지향적’인 근대를 허물고 ‘미래지향적’인 현대를 건설하였다. 한명은 찰스 다윈이다. 그는 1859년 저술한 <종의 기원>이란 실험적인 책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을 이해는 새로운 시선視線을 제공했다. 만물은 고정 되어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 그전 인간들은 신이 이 세상을 자신들이 당시 보는 대로, 태초에 만들었고 자신들이 살던 당시에 그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소위 ‘진리’나 ‘교리’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경직된 틀 안에 강제로 집어넣었다. 우주라는 시간에 진리가 있다. 그 진리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슬그머니 쉬지 않고 변화시킨다. 다윈이 발견한 사실은 인간도 이 변화의 산물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자코메티는 끝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대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다윈은 자코메티에서 관찰의 덧없음과 응시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두 번째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다. 그는 19세기 말에 시작한 금융시장과 자본주의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1867년 <자본론>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고독, 즉 소외疏外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독일인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파리로 건너온 부유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공산당선언>을 작성하였다. 엥겔스를 따라 영국 런던으로 가 ‘노동자들의 성서’인 <자본론>을 저술하였다. 자코메티 작품의 주제는 바로 ‘소외’다.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충돌하여 빚은 1,2차 세계대전의 비참함을 목도하면서 죽음, 허무, 절망을 통해 인간 내면에 담고 있는 소외를 작품으로 남겼다.

세 번째 인물은 프로이트다. 그는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를 시작한 1900년에 인간이해의 근본적은 틀을 전환시킨 <꿈의 해석>이란 책을 내놓았다. 인간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아’自我라고 생각한 ‘의식’意識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는 인간이 전혀 들어갈 수 없는 ‘무의식’無意識이다. 무의식을 들어가는 통로는 꿈이다. 인간의 개별적인 행위들 뿐 만 아니라 집단적인 행위의 성과인 문화와 문명은 인간 심성 밑바닥에서 억눌려 표면으로 떠오른 적이 없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한 조각일 뿐이다. 자코메티가 프랑스로 이주해와 당시 입체주의나 초월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실험한 작품들의 바닥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libido라는 ‘억눌린 성’性에 대한 표현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에는 사회적인 갈등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표상을 인간과 인간, 남과 여, 자신과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자신’과의 심리적인 관계가 깊이 묻혀있다.

파리는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의 생각들이 모여 지적인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 소용돌이는 가장 먼저 예술에 등장하여 또 다른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였다. 특히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었다. 자코메티는 몽파르나스 사거리 근처 쇼미레르 가 14번지에서 로댕의 조수였던 앙트완 부르델이 가르치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5년 동안 수학한다. 자코메티가 스위스 스탐파에서 파리로 이주한 행위는 부모로 독립하여 두발로 걷기 시작한 시도라면, 부르델의 지도아래 지낸 5년의 수학은 근대의 마지막 예술가인 로댕과 부르델을 통해 과거의 기술들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실험공간이었다.

사도 바울도 자신만의 그리스도교 사상을 구축할 때, 이전 전통을 섭렵하고 자신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더해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이 과정을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고린도전서> 15:3)라고 표현한다. 이 문장에서 ‘받았다’라는 그리스 동사는 ‘파라람바노’paralambano로 자신이 그리스도교 복음에 관한 내용 전달받는 수혜자라는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후 바울을 자신의 삶의 지혜를 더해 새로운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달하였다’. ‘전달한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파라디도미’paradidomi로 자신은 거룩한 복음 전달하는 통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전승과정은 당시 유대교 경전인 미쉬나에서도 등장한다. 미쉬나에는 중국의 <논어>와 같은 <선조들의 어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어록의 첫 구절도 유사하게 시작한다. “모세는 시내산으로부터 토라(경전)을 받았고,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전달하였다.” 히브리어로 쓰인 이 책은 ‘받았다’라는 동사로는 ‘키벨’qibbel을 ‘전달하다’라는 동사로는 ‘마사르’masar를 사용하였다. 모세는 자신이 경전의 저자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경전을 수여받은 수혜자이고 그것을 후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전달해준 심부름꾼이다.

자코메티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수학시절인 1925년부터 재현미술이나 구상미술에서 흥미를 잃었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아방가드 조각연구다. 당시 유럽은 인상주의를 지나 후기 인상파, 야수파, 입체주의, 그리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부족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전에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그는 신체의 몸통만 조각한 ‘토르소’(1925년), 아프리카 덴 부족으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숟가락 여연’(1926년)은 참신한 예술를 시도한 작품들이나 여전히 브루델이란 스승 밑에서 스승의 인정을 받으려는 응석이었다.

자코메티는 1922년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에 왔고, 1926년까지 브루델 밑에서 예술을 수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 다니기를 멈췄다. 그는 프루아드보 가街에 있던 작업실의 천정이 너무 낮고 조명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1927년 4월 어느 날, 그는 프루아드보 가街에서 900m 떨어진 이폴리트 맹드롱 가街 46번지 작업실로 이사 갔다. 자코메티와 그의 동생 디에고는, 자코메티의 작품들과 미술 도구들을 손수레에 실어 날았다. 그곳은 그를 죽을 때까지 거의 40년동안 예술적으로 승화된 인간으로 만드는 용광로가 되었다. 이곳은 모세의 호렙산 가시덤불이며 엘리야의 시내산 동굴이다. 그가 이사한 곳은 1910년대 폐품들을 모아 지은 엉터리 건물이다. 단층에 건축 폐기물들을 주서 모아 올려 삼층이 된 건물이다. 그 가운데는 여러 작업실과 방으로 들어가는 복도가 있다. 이 건물에는 전기, 수도, 난방시설이 하나도 갖추어 지니는 않고 복도 중간에 허술한 재래식 화장실에 있다. 알베르토의 작업실은 복도 왼쪽 첫째 방으로 겨우 5평이다. 그는 동생 디에고와 침대, 책상, 찬장을 배치하였다. 방은 좁지만 천정이 높고 창문으로 햇빛이 충분히 들어왔다. 그리고 방 가운데 조각대와 화판, 그리고 조각과 회화에 필요한 도구들을 책상위에 쌓아 놓았다. 자코메티는 이 어둡고 초라하고 추운 공간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신기한 공간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예술과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전수받은 예술이 아닌, 자코메티라는 고유한 인간이 독창적인 작품을 낳았다. 석고로 완성한 <응시하는 머리>는 이폴리트 맹드롱 가街 46번지 작업실에서 드디어 발견하기 시작한 ‘자코메티’ 자신이다. 이 작품은 온통 여성적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키클리데스 대리석 동상이나 이집트 왕조의 사작을 알리는 기원전 3100년 작품 <나르메르 화장품>과 같은 널찍한 판板이 생각난다. <응시하는 머리>는 나를 무장 해제시켜 평온하게 만드는 ‘어머니’이며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묻게 만드는 ‘질문’이다. 그런데 나를 영원히 응시한다. 이 작품은 기본적인 형태인 직사각 형이다.그러나 이 형식은 왼편에 세로로 음각된 부드러운 타원형과 오른편에 가로로 음각된 타원형으로 나를 영원히 바라보는 응시가 그 흔한 형식을 잠재운다.

자코메티는 표현하기 힘든 다윈의 변화무쌍이나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은 비육체적인 조각을 창작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동시에 어리둥절하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 같지만 동시에 혁신적이다. 직사각형 머리를 목이 바치고 그 밑에 좁은 직사각형 몸이 전체를 떠받치는 몸뚱이가 되었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어떤 대상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기억’記憶만을 의지하여 제작하였다. 어떤 대상의 본질은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분석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억 속에 떠오는 강력한 인상 한가지를 표현하기 위해 ‘나머지’를 희생犧牲시킨다. 희생이만이 나의 고유함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몸에서 머리, 팔, 다리 모두를 희생시킨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직사각형의 판 뿐이다. 이 판은 자코메티에게 만족스럽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본질을 찾기 위해 걷어내고 남은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대상을 표현할 수 없는가를 표현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전통적인 조각방식을 산산조각낸다. 정확한 묘사, 그 형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자만심, 그리고 추상을 통해서만 본질에 접근할수 있다는 입체파 교리를 파괴한다. 이 작품은 그를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초현실주의 예술가 이너 서클에 가입시키는 허가증이 되었다.

<응시하는 머리>는 동상이 아니라 ‘시선’이다. 이것은 물건이면서 물건이 아니다. 그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들었다. 그는 인간이성이 괴물이 된 제1차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자기모순’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자기모순’을 눈의 기능인 ‘응시’凝視를 통해 더듬어 찾는다. 나는 움푹 파여 나를 바라보는 ‘응시’를 바라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사진

알베르토 자코메티 (1901-1966)

<응시하는 머리> 1928

40 cm × 36.5 cm × 6.5 cm

알베르토 자코메티 재단, 취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