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7. (日曜日) “광야(2)” ἔρημος (그리스어, 에레모스)


‘금식’은 오래된 자아를 응시하여, 유기할 것을 가려내고 새로운 자아를 획득하기 위한 경계의 의례다. 금식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할 뿐만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버리기 위한 혹독한 훈련이다. 금식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과거의 욕심들, 예를 들어 사업의 번창이나 자신의 건강, 또는 자녀의 대학 입시 같은 것을 기원하는 것은 금식의 원래 목적을 상실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그 숭고한 목적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만든 영웅 모세는 40일 동안 두 번 금식기도를 감행했다. 한 번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머물 때고, 다른 한 번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나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부순 뒤 다시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에 올랐을 때다. 유사하게 예언자 엘리야도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받아, 시내 산으로 도망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수행했다. 엘리야는 이 경험을 통해 신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천둥, 번개, 지진과 같은 커다란 천체의 변화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 후에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약성서에 40일 금식기도를 통해 인간의 아들에서 신의 아들로 변신한 자가 있다. 바로 예수다. 예수는 30살이 되어 광야에서 세례운동을 하고 있는 요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은 더 이상 ‘요셉의 아들’ 목수가 아니라, ‘신의 아들’이며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도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는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수련하기도 결정하였다. <마태오 복음서>은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예수에 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다.

<마태오 복음서> 4.1-2

예수가 세례을 받은 직후, 하늘에서 영적인 기운이 내려와 그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 그곳은 식물 한 포기 없는 ‘광야’였다. 영적인 기운이 예수를 그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사막으로 데려간 이유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다. 이 시험의 주체는 신이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단지 신이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이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반드시 시험을 받았다. 그것도 매우 가혹한 시험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75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100세에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을 신에게 번제로 바쳐 죽이라는 시험을 받았다. 신이 ‘의롭고 정직하다’고 인정한 욥은 동방의 의인이자 최고 부자였다. 신은 사탄에게 욥의 신앙을 시험하도록 허락했다. 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가 죽고 모든 재산을 잃고 거지 신세가 되었지만 욥은 신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은 사탄에게 두 번째 시험을 허락한다. 사탄은 욥의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게 해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했다. 욥은 이러한 끔찍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삼라만상에 숨어 있는 신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영적인 기운이 예수를 데리고 간 사막을 그리스어로 ‘에레모스(ἔρημος)’라 한다. 이 단어에는 ‘사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래 의미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버려진/비어 있는/ 구별된 공간’이라는 의미다. 말하자면 세상과 떨어져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단어는 고대 히브리어로는 ‘미드바르(midbar)’이며 예수의 언어인 아람어로는 ‘미드바라(midbara)’다. 성서에서 40일은 상징적인 의미로,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없애는 기간을 의미한다. 예수는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공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참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공간에서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이 경계는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으로,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신비한 순간이다.

만일 내가 사막이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간에서 40일간 지내야 한다면 무엇을 하며 지낼까? 부모, 형제,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할까? 아니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할까? 예수는 일찍이 엘리야가 들었던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 자연히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일을 묵상하는 시간은 위대한 사람들의 필수 과정이다. 예수는 세례를 통해 과거와 단절하고 40일간의 묵상을 통해 자신의 미션을 받는다. 묵상이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신의 섭리에 맞는지 독수리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연습’이다. 기도를 통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스스로 관찰자가 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렇게도 집착했던 ‘에고’라는 자아에서 벗어나 ‘무아’의 상태로 진입하는 수련이 바로 기도다. 이 수련을 통해 내가 네가 되고, 내가 그것이 되기도 한다. 예수는 40일간의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완수해야 할 미션을 깨닫는다. 예수는 과거 욥의 고백처럼 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예수는 세상을 자신의 시각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예수는 신비라는 ‘절대타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사진

<광야의 예수>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 (1837-1887)

유화, 1872, 84 cm × 214 cm

모스코바 트레트야코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