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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2.(水曜日) “홀로”


침묵은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훈련이다. ‘나’라는 1인칭을 통해, 2인칭과 신체적으로 구분되고 3인칭과 정신적으로 떨어져 스스로 존재할 때 가만히 떠오르는 존재다, 침묵을 통해 ‘나’라는 3인칭으로서의 1인칭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주변과 나를 구별하는 부사副詞가 필요하다. 그 부사가 ‘홀로’다.

시간이 멈춰버린 코로나 시대에, 내가 자신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을 마련하지 못하면, 나는 시냇물에 떠다니는 부초가 될 것이다. 17세기 영국시인 조지 허버트( (1593–1633)는 <인간경험>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13. By all means use sometimes to be alone.

14. Salute thyself: see what thy soul doth wear.

15. Dare to look in thy chest; for ’t is thine own;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종종 홀로 계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인사하십시오. 당신의 영혼이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감히 당신의 가슴 안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움직이지 않는 ‘중심中心’을 찾기 전에는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중심은 삶의 조절하며 평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중심이 흔들리면, 그의 삶 전체도 흔들린다. 만일 그가 이 흔들리는 중심에 의지한다면, 그는 넘어지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인간은 세 번 태어난다. 부모로부터 육체를 지닌 존재로 우연히 태어나고, 학교로부터 사회에 적응하고 경쟁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태어난다. 그(녀)가 육체와 정신을 지닌 존재이지만, 여전히 부모와 타인에 의존한다. 인간은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유일무이한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깨어나고,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영적으로 깨어난다. 자신이 아닌 남에게 의존하는 오래된 자아를 나비가 고치를 벗겨내듯이, 새가 자신을 보호하는 알을 깨고 나오듯이, 과감히 파괴한다. 그는 새로운 자아로 부활한다.

이 부활의 전제조건이 있다. 나비나 새가 그렇듯이, 아니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이 그렇듯이, 홀로 이 과정을 진행해야한다. 그는 그 누구의 호의나 해택도 원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조르지도, 불평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 고정에서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가 온전히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복, 만족, 그리고 위안은 이 중심에서만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다른 물건의 소유에서 온다는 교육받아왔다. 교육은 학생들을 제로섬 게임에 투입시키고, 미디어는 하루 종일 물건과 물건의 가져다주는 편리함이 행복이라고 세뇌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지속적인 갈망, 더 커진 욕망, 그것을 소유할 수 없는 실망으로 폐망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는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샘물을 발견한 사람은, 결코 불행이나 슬픔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떠나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고 넘어지면서 다리에 근육과 유연함을 얻어 걷기 시작한다. 인간도 자신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두발로 홀로 걷기를 배워야한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은 한가지다. “홀로 걸기를 연습하라!” 그들은 겸손하고 당당하게 홀로 선 사람들이다. 남들이 상상할 수 있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찾은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추구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언행에 대한 변명이 없다. 사람들이 비판이나 칭찬은 그의 옷에 달라붙은 먼지다. 그는 이것들이 가차 없이 쳐낸다. 그는 변화무쌍한 타인의 이기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서 희미하게 나오는 빛이 인도하는 길을 조용히 걸어갈 뿐이다.

내가 홀로 설 때까지, 스승이나 신의 도움을 헛되이 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빛을 감지하고 그것을 발의 등불로 삼아 걷는다. 나는 누구로부터 구속되지 않고 나는 매순간 온전한 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자립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는다. 자립은 매일 매일 새롭게 더 높이 탄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완벽은 완벽이 아니라 완벽을 추구하는 마음이며 한없는 모자람을 채우려는 노력이다. 그 모자람에 대한 인식이 자신을 더 나은 완벽을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자립하는 인간은 자만심에 아슬아슬하게 선 사람이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원칙과 이상에 뿌리를 둔 사람이다.

형의 재산을 갈취한 성서인물 야곱이 새로운 이름을 지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이 있다. 야곱이 형을 만나기 전날, 불안한 밤을 보낸다. <창세기> 32.24에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야곱이 뒤에 홀로 남았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가기 두려워 모든 종들과 심지어 가족들을 얍복강을 건네 보냈다. 그는 처음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였다. 성서저자는 그 순간을 ‘홀로’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야곱이 홀로 자신과 마주하자,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혹자는 ‘어떤 사람’아 천사 혹은 신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주하기 두려운 ‘온전한 자신’이다. 야곱은 자기-자신과 밤새도록 씨름하여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그 이름이 ‘이스라엘’ 곧 ‘신과 싸워 이겼다’다. 이 문장에서 ‘어떤 사람’은 신이며, 동시에 자기-자신이다. 자신과 마주하여, 자신을 변모시키는 마술이 ‘홀로’다. 그 어느 때보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요즘, 흠모하는 자기-자신을 마주할 절호의 기회다.

사진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폴 고갱 (1848–1903)

유화, 1888, 73 cm x 92 cm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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