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5. (火曜日) “환대歡待”


농업은 인간을 한곳에 정착시키지만, 상업은 자신에게 부족한 재화를 얻기 위해 이주移住시킨다. 인간은 이주하는 동물이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의 원고향인 아프리카 동부와 북부에 안주하지 않았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 유전자는 아프리카 북부 튀니스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 호모 사피엔스들은 아프리카에 남았지만, 일부 호기심으로 가득한 호모 사피엔스들 20만년 전과 10만년 전 두 차례 걸쳐, 고향 아프리카를 떠났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상상과 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만이 인간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그들은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가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장소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유럽에는 이미 네안데르탈인들을 비롯한 다른 유인원들이 먼저 들어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유사인종들 간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특히 이주민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본격적으로 만나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사만오천년에서 사만년 사이에 경쟁하였다.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들의 가까운 거리에서 공존했으며 이종교배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독일 막스프랑크 연구소 파보Paabo박사에 의하면, 유럽인과 아시아인들의 유전자에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발견되면, 호흡기와 피부 질환과 병의 원인을 네안데르탈인 유전자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네안데르탈인들은 기원전 3만년경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네안데르탈인이 한 순간에 멸종된 이유는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의 ‘사회성부족’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은 기껏해야 10명이하의 인원들이 모여 살았다. 그 이상의 다양성, 새로움, 그리고 다름을 수용하지 못했다. 이들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들은 수십 명이 함께 거주하면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선 ‘공동선’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지닌 사람들이 거주하는 구역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익숙한 직계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과 생활하였다. 이들은 근친상간은 많은 유전적인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들에게 ‘외부인’은 적이며, ‘다름’은 제거 대상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달랐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주하였다. 그들이 밟는 땅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들은 이주를 통해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 그곳에 원래 거주하는 자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고고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는 ‘낯선 사람’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영입하여 공동체를 끊임없이 확대하였다. ‘낯선 사람’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가족 혹은 친구로 여겼다.

낯섦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도를 ‘환대’歡待라고 부른다. ‘환대’는 아프리카나 중동 사막에 거주하는 베두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그들은 사막에서 마주치는 낯선 자들을 무조건 환대한다. 그들은 환대한 행위를 용맹으로 여겼다. 베두인들의 오랫동안 거친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낯선 자를 환대했기 때문이다. 베두인 여성들의 윤리를 아랍어로 ‘이르둔’irdun이라고 부른다. ‘이루둔’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숙한 상태를 유지하는 마음가짐’이다. 베두인 여성들은 ‘이르둔’은 한번 잃으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베두인 공동체 전체는 여성들이 ‘이르둔’을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자신의 재산을 부족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이 공동체적 노력을 ‘샤라프’sharafشرف라고 불렀다.

베두인들에게 마을의 안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윤리는 ‘낯선 자’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자들’이 심지어는 적이라 할지라도, 일정기간동안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한다. 자신들이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숙식을 마련해야한다. 베두인들은 삶의 원칙을 아랍어로 ‘디야파’diyafa ضيافة‎라고 불렀다. ‘디야파’는 흔히 ‘환대’라고 번역하며 베두인 이 지녀야할 최고의 덕목이다. 기원후 7세기 무함마드는 ‘낯섦’을 삶의 방식에서 축출하여 자신의 상업적인 이윤만 쫓아가는 메카 사람들에게 그 생활과의 단절을 요구한다. 무함마드는 기원후 632년 공동체를 이끌고 메카에서 부족주의 생활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자신의 아버지 무덤이 있는 야쓰리브(후대 메디나로 개명)로 ‘이주’한다. 야쓰리브인들을 무함마드와 그 일행을 환대하여 ‘이슬람’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주’라는 아랍어 ‘헤지라’는 ‘과거의 편안한 삶과의 폭력적이며 단호한 단절’이란 의미도 지닌다. 이슬람에서 사회약자에 대한 배려도 바로 ‘디야파’라는 환대정신에 뿌리를 둔다.

왜 베두인들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숙식을 제공하는가? 그 낯선 자가 적이란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도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 왜 그들은 이 환대정신을 최고의 ‘명예’名譽라고 여겼는가? 이런 행동을 설명하려는 과학적인 시도가 ‘호혜적 이타주의’다. 최근 몇몇 과학자들은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말한 ‘이타주의’는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 서문에서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손톱과 발톱이 피로 물든 자연(혹은 인간의 본성)’nature, red in tooth and claw으로 표현하였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도모하는 유전자를 몸에 지닌 숙주일 뿐이다. 미국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트리버스(1943-)는 인간의 ‘이기적 행위’는 ‘호혜적 이타주의’로 설명한다. 인간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인간을 지금 당장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도와주는 이유는, 자신이 반대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윤과 명예를 위해 전략적 선행을 베푸는가?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인간 삶의 규범인가?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는 달리 1년 정도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망아지는 어미말로부터 나와 30분이면 스스로 걷지만, 인간이 걷기까지 1년이 걸린다. 아니 스스로 독립하기까지 수십년이 걸린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비효율적이지만 한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 어린아이는 1년 동안 누군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젖을 주고 양육하는 것을 본다. 누군가의 이타적이며 헌신적인 노력이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배운다. 인간은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이기적인 문화에 물들어, 이기적 행위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누구를 위해 아무런 대가없이 목숨을 바치는 ‘어머니’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 마음의 확장이 바로 ‘환대’다.

사진

<후레이!>

덴마크 화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1851–1909)

유화, 1888, 134.5 cm x 165.5 cm

스웨덴 에테보리 미술관 Gothenburg Museum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