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火曜日) “침묵沈默”



바야흐로 한 해의 수고를 추수하는 가을이 왔다. 9월은 봄에 심어놓은 희망의 싹이 여름의 작열하는 햇빛과 장마를 견뎌낸, 자기 나름의 열매를 매미, 잠자리, 그리고 귀뚜라미의 세레나데로, 옹골차게 맺는 시절이다. 1년이 인생이라면, 가을은 인생의 클라이맥스다. 만일 내가 수련하는 삶을 초지일관 수행해 왔다면, 가을의 하루는 1년이며 일생이다. 오늘 아침 북한산 둘레 길을 산책하다 하늘을 보니, 하늘에 있는 르노아르가 구름을 하얀 물감으로 뭉게뭉게 그렸다. 내가 의도한 그림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작품을 그렸는가?

COVID-19은 인류 문명과 문화의 체계와 문법을 새로 장만하라고 말한다. 어리둥절한 인류는 이 감염병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확진자 숫자를 세느라 정신없다. 하루는 확진자 숫자로 전락하였다. 이 감염병이 9개월간 지속되었지만, 기세를 줄이지 않는다. 인류문명의 근간인 ‘모임’을 금지하고 해체시키고 있다.

9개월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비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정상’으로 자리 잡았다. 침묵沈默은 금이며 생명보존의 기본원칙이다. 우리 모두는 타인과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마스크를 착용한다. 플라톤은 인간을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려 공감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 즉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고 정의하였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인간됨의 특징을 포기하는 ‘호모 실렌치오’Homo Silentio, ‘침묵하는 인간’으로 변모하였다.

50년 전 컴퓨터가 등장하고 나서, 우리는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만든 이름인 컴퓨터 ID로 제2의 자아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실제공간의 ‘나’라는 인간이, 컴퓨터라는 가상공간의 ‘가상의 나’보다 더 인간답고 가치가 있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2020년은 아마도 ‘가상공간 자아’가 ‘실제 공간의 자아’보다 더 중요해진 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보자. 한 집에 살고 있는 가족이외에, 나는 모든 이들과 SNS로 심지어, 목소리가 아니라 문자로 소통한다. 인간이 그 좋아하던 여행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심지어는 생계의 터전인 직장도 갈수 없다.

나는 9월을 침묵을 수련하는 달로 정했다. 다른 사람과의 대면이 불가능하고 불편해 지는 이 시점에, 내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자 수련은 ‘고요’다. 현자의 말에 힘이 있는 이유는 그가 침묵을 수련해왔기 때문이다. 인류의 스승들은, 그들이 고요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친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인류의 경전들은, 한 두 명의 수제자들이 스승의 침묵을 문자로 건져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면서, 그의 말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흘러나오는 품격에 놀랐다. 그는 예수에게 질문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예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답한다. 그것은 심오한 지혜와 깨달음을 요구하는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겸손, 견책, 사색으로 가득한 말쟁이들의 가벼움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진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힌두학자들이 신이 누구인가 붓다에게 물었을 때, 붓다는 침묵한다. 그는 힌두학자들이 머리로 아는 것 보다 더 잘 가르쳤다. 그는 신은 말이 아니라, 신의 품격, 즉 친절, 선의, 진선미를 조용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 모르거나 약간 아는 것으로 남들을 가르치려하는 것만큼 어리석인 행위는 없다. 지혜와 인격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겸손이기 때문이다. 혀를 절제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마음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 혀에 재갈을 물려 마음을 자유롭게 만들고, 자유로운 마음은 침묵의 주인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루 종일 재잘거리고 농담을 하고 미사여구를 자랑한다. 그는 항상 자신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멋진 말로 상대방을 압도했다고 우쭐한다. 지혜로운 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삼가고, 농담하지 않으며 타인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어수룩하고 패한 것 첨 보인다. 실제로 자신이 패했을 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급한 변명으로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도발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숭고한 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수련중이란 표시다. 상대방의 입장을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소유하려는 겸손이다. 분별이 없고 불친절한 사람들은 약간의 도발에도 반응한다. 숭고한 자신을 침묵으로 연습하는 자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것은 땅속에 뿌려져 오랜시간을 거쳐 발아한 싹이다. 블랙홀을 주위를 도는 우주도, 태양주위를 도는 지구도 언제나 조용하다. 말이 많은 사람은 자꾸 달가닥 거리는 자동차나 냉장고와 같다.

성공한 기업가는 자신의 계획, 방법, 사건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성공에 현혹되어 자랑하기 시작하면, 그의 사업은 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수련하는 자는 자신의 수련과정에서 얻는 작은 성과에 대한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내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창녀 데딜라가 영웅 삼손에게 “당신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죠?”라고 끈질기게 묻는다. 삼손은 결국 자신의 입을 지키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자랑한다.

“나의 머리는 면도칼을 대어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머리털을 깎으면, 나는 힘을 잃고 약해져서, 여느 사람처럼 될 것이다.”

<사사기> 16.17

삼손이 자는 동안 그의 머리카락이 잘린다. 삼손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영웅에서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성공이 세속적이던, 영적이던, 그것은 침착하고, 일관되고 단호한 침묵이 만들어낸 예술이다. 진정한 침묵은 단순히 조용한 혀일 뿐만 아니라, 조용한 마음이다. 조용한 마음은 평정심이다. 그것은 자신을 정복한 조용한 바다와 같다. 졸졸 소리를 내는 욕심, 유혹, 슬픔은 거룩하고 심오한 조요한 바다에서 조용해진다. 나는 침묵하는가? 혹은 반응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나를 응시하는가? 외부의 작은 도발에도 무의식으로 반응하는가?

사진

<삼손과 데릴라>

독일 화가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

유화, 1902

프랑크푸르트 슈타델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