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9.(日曜日) “섭리攝理”
나는 언제가 부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바람은 지나가버리는 세월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혹은 다가오는 세월이 간직한 의미를 헤이라기 위한 임시방편일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한적한 시골에 살다가 느닷없이 서울로 이사와 도시적응 수련하고 있다. 쉽지 않다. 내가 1년 동안 머무를 거주지를 마련하여, 나와 아내, 그리고 반려견 세 마리가 과연 잘 지낼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다. 멀리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두 딸들이 한국을 방문해도 머무를 장소도 없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서울에 머무를 작정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떠돌이들이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정착민들과 달리, 자신들은 유목민으로 목초지를 찾아 계절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히브리인’이라고 불렀다. ‘히브리’란 단어는 ‘국경이나 경계를 넘나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바르’에 인종을 나타내는 어미인 니스비nisbi 어미 ‘-이’가 첨가되었다. ‘히브리’는 ‘모든 사람들이 안주하는 장소로부터 자신을 강제로 탈출시켜 자신을 취약한 장소로 내몰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바르’라는 동사는 또한 ‘관습이나 규율을 어기다; 위반하다’라는 뜻도 있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행위를 시도하는 사람은 철부지이거나 상식을 위반하는 어리석은 자다.
히브리인들이 스스로를 ‘히브리인’이라고 불렀다면, 정착민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도시로 함부로 들어가 잠시 거류하는 사람들을 히브리어로 ‘게르’gēr라고 불렀다. ‘게르’는 ‘히브리인’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적인 용어로 ‘외국인 노동자; 임시 체류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순수한 한국어로는 ‘나그네’일 것이다. 나그네는 정해진 장소인 정처定處가 없어 자신이 가는 곳은 영원히 머무를 장소가 아니라, 다음 장소를 거쳐 가기 위한 징검다리다. 만일 오늘이, 이곳이 내가 적절한 시간에 가야할 목적지의 중간기착지라면, 이곳은 그것을 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장소다.
자신이 삶의 나그네라는 생각이 인간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그런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정교한 삶의 문법인 ‘종교宗敎’를 탄생시켰다. 과학이 사물을 분석하고, 철학이 사물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면, 예술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한 단면을 포착하여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용기이며, 종교는 그런 세계를 갈망하여 지금-여기의 삶을 정색을 하고 조절하는 절제다. 이 절제를 수련하는 자에게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필연必然이다. 우주의 원칙이 인과응보와 질량보전이라면, 세상엔 우연이란 없다. 우연은 필연이 드러나기 위한 수순이며. 필연의 변장이다.
떠돌이였던 히브리인들을 의미를 지닌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의 경험이 필요했다. 성서는 이 공동의 경험을 40년간의 광야생활로 묘사한다. 광야는 도시의 편함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공간이다. 임시체류자들이 광야 40년간의 기간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으로 탄생한다. <창세기> 37-50장에 등장하는 ‘요셉’이야기는 독립적인 단편소설로, 히브리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준다. 배경으로 시작한 이 이야기가, 이집트 탈출하는 40년 광야생활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은 16년에 걸쳐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네 권의 소설로 저술하였다. <야곱이야기>(창세기 27-36; 1926-30년), <젊은 요셉>(창세기 37; 1931-32년), <이집트의 요셉> (창세기 38-39; 1932년), <부양자 요셉>(창세기 40-50; 1940-43년). 토마스 만은 요셉이야기를 유일신을 도입한 아크나텐 시대에 조망하여, 유대교의 기원을 태양신 아텐Aten과 연결을 시도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편애하는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로 내려가는 대상에게 노예로 팔아 넘긴다.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급기야 이집트 전체를 먹여 살리는 총리가 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고대근동에 기근이 들어,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구하려 이집트로 내려가 곡식을 구걸하게 되었다. <창세기> 45.1은 자신을 노예로 판 형제들을 본 요셉의 복잡한 감정이 미묘하게 표현되었다.
“요셉은 자신 곁에 서 있던 모든 이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울부짖었다: 모두 물러 나가십시오. 요셉 곁에서 그들이 물러나가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의 형제들에게 밝혔다.”
자신의 신분을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 앞에서 밝힌 후, 그는 목 놓아 운다. 요셉은 아직 어리둥절한 형들에게 입을 열어 말한다. “제가 요셉입니다. 아버님께서 살아 계십니까?” 그의 형들은 아직도 요셉이 누구인지 어리둥절하다.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다시 말한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제가 당신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당신들이 오래전에 저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이 감정에 북받쳐 오열한 이유는 형들에 대한 분노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셉의 울음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숭고한 울음이다. 숭고한 울음이란 상상할 수 없고 예기하지 못한 생경한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진정하십시오.
형들이 저를 오래전에 이곳에 팔아넘긴 것을 슬퍼하지도 자책하며 분노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에 앞서 이곳에 미리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5.5
요셉은 자신의 불행은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정교한 필연必然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집트 전체의 곡식을 관리하는 대신으로 이년동안 지속된 기근이 앞으로 오년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셉은 자신의 불행은 신의 정교한 계획아래 펼쳐진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한다.
“하느님은 저를 형들보다 앞서 이곳에 보내, 이 땅에서 ‘남은 자’로 오래전에 결정하셨습니다.
남은 자는 위대한 구원으로 형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입니다."
<창세기> 45.7
위 문장의 핵심단어는 ‘남은 자’란 의미의 히브리어 ‘셔에리쓰’(šəʼērîth)다. ‘남은 자’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남다른 고통을 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의 노예가 되어 삶을 비관하거나 타인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인생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결국 깨닫는다. 자신의 고통은 타인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섭리攝理는 ‘남은 자’가 궁극적으로 깨닫는 지혜다. 머리에 달린 두 개의 귀(耳)가 아니라, 고통의 경험을 통해 그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손(扌)으로 마음 속 싶은 곳에 존재하는 제삼의 귀(耳)로 자신을 덮친 역경의 의미를 곰곰이 묵상하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요셉은 운다. 자신의 희생이 거룩하며, 신이 그의 삶을 통해, 형들과 가족, 더 나아가 미래에 이룰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금 경험하는 전대미문의 COVID-19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 이 역경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섭리라면 좋겠다.
사진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다>
러시아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1830–1866)
유화,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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