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6.(木曜日) “애기야타愛己愛他”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나침반들이 있다. 인간과 인간에 깊은 영향을 주는 환경에 대한 심오한 사상들이다. 학자들은 이 사상들을 모아 ‘학문’이란 분야를 만들었다. 예술은, 인간과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학문이고, 과학은 제3자의 시각으로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최선을 도출해 내려는 과정이며 인문학은 그것을 공부한 사람의 생각, 말, 그리고 언행을 통해 진리를 체득하고 실천하려는 체계다.
특히 인류가 이룩해낸 거의 모든 종교체계들을 관통하는 강력하면서도 흠모할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비慈悲다. 종교의 교리는 자비에 대한 각주다. 자비를 간략하고 강력하게 표현한 문구가 ‘황금률黃金律’이다. 이들은 모두 ‘당신이 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말라’ 혹은 긍정적인 방식으로는 ‘당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이다.
동서양의 주요 종교들은 이 핵심을 나름대로 시대에 알맞게 터득하고 발전시켜왔다. 만일 당신의 선행을 당신이 속한 집단에만 국한시킨다면, 그 집단은 다른 집단과의 이익이 상충해 분쟁만 남게 될 것이다. 자신이 우연히 태어난 집단과 집단이념에서 벗어나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교육이다. 이 벗어나려는 노력이 무아無我이며 해탈解脫이고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습관으로 정착한 가치가 자비慈悲다.
황금률은 유대인들을 생존하게 만드는 마지노선이었다. 기원후 70년 유대인들은 다시 한 번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했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는 예루살렘을 부수고, 유대인들을 포로도 잡아간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소위 디아스포라를 시작한다. 성전이 기원전 515년에 재건됐다. 그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의 유대 점령에 대항한 유대인 봉기는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신이 거주한다고 믿었던 예루살렘이 두 번째 파괴되자 망연자실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유대인들에게 창의적인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유대교 랍비들은 자신들이 간직해온 경전연구를 통해 다시는 파괴할 수 없는 ‘마음의 예루살렘’을 짓기 시작했다. 기원후 200년경 등장한 유대교 경전 <미쉬나>, 그리고 5-6세기 등장한 <탈무드>가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경전들을 공부하는 행위가 천상의 예루살렘을 위한 벽돌을 하나하나 쌓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와 동시대인인 위대한 랍비 힐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힐렐에게 한 이교도가 다가와 “당신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나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힐렐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스스로에게 혐오스러운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각주일 뿐이니, 가서 이것을 공부하시오”라고. 그는 여기에서 신의 유일성, 천지창조, 출애굽 혹은 613 계명과 같은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힐렐에게 그저 황금률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 다른 유일신 전통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헌신의 행위와 믿음 체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들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기심 없는 배려이다.
유대교가 말하는 첫 계명인 ‘신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리스도교가 전파하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다’는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사랑하고, 때로는 적대적이며 원수와 같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하다’는 한 순간의 행동으로 마치는 동사가 아니다. ‘사랑하다’는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처럼 애쓰는 마음가짐’이다. 누가 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자신을 깊이 사랑한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흠모할 만한 자신을 상정하고, 그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쓸 때, 인간은 ‘사랑’이라는 인류 최고의 가치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을 시도해야한다. 누가 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자신을 깊이 사랑하기를 연습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수용뿐만 아니라, 자신이 변모시킬려는 내일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대다.
며칠 전. 강남 신사동에 위치한 ‘도산공원’에 들어가 보았다. 서울에 살면서도, 이 공원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다. ‘도산島山’은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로 활동한 안창호 선생의 호다. 도산은 섬에 우뚝 솟아오른 산과 같다. 그의 사상을 여실이 드러내는 문구가 있다. 바로 ‘애기애타’愛己愛他다. 도산은 이 문구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한자 ‘애’의 밑 부분에 나오는 心과 夊를 친구를 의미하는 우友로 대치하였다. ‘애기애타’는 자신을 가장 심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도산의 깨달음과 철학을 그대로 담았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이 노래한 Song of Myself 모세가 계시 받은 신명 I am Myself의 Myself가 도산에겐 己로 표시되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나를 존경할 만한 나로 수련하고 있는가? 신은 ‘그런 자신’을 위해 인내를 지나고 조용히 수련하는 자에게 ‘인격人格’을 선물한다. 도산공원 안에 설치된 도산의 비문이 나를 꾸짖는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사진
도산선생 ‘애기애타’ 친필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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