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5.(水曜日) “생기生氣”

2020.8.5.(水曜日) “생기生氣”

내가 매 순간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내 생명을 보존해 주는 생명연장 장치가 있다. 바로 ‘숨’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니 내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심장이 박동하고, 그 박동소리가 내 코를 통해 숨으로 표현되었다. 숨은 나를 매 순간 살아 있게 만드는 기운, 즉 ‘생기生氣’다. 고대 이스라엘인이 바빌로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의 환상을 본 예언자 예스겔은 자신의 일상을 통해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다.

신이 에스겔을 잔인하게 다루는 이유는, 신도 유대인처럼 함께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에스겔이 자기 아내의 죽음조차 슬퍼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애도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에스겔의 가장 유명한 환상은 이른바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다. 신은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간다. 이 골짜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게헨나(힌놈의 아들 골짜기)’와 같은 시체를 유기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게헨나는 고대 가나안인이 자신들의 신인 몰록(Moloch)에게 바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던 장소로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에스겔은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에 서 있었다.

신이 그에게 <에스겔> 37.3에서 불가능한 질문을 한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신은 에스겔에게 뼈에 예언의 말을 전하라고 명령한다.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라고 하며 실의에 찬 사람들이다. 소설 『흑야』에서 엘리에제르가 자신의 아버지 슬로모가 피 흘려 죽는 것을 목격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공황 상태를 바로 마른 뼈로 비유하였다. 신은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들을 향해 예언하도록 <에스겔> 37:4-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신이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인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분이 바로 야훼 신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봄에 뿌린 씨가 발아해 줄기와 잎사귀를 내고 시절을 좇아 열매 맺는 과정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 그 자체다. 신은 생명을 창조하는 그 신비를 운행하는 자다. 신은 보기에는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마른 뼈지만,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생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다. 루아흐는 모든 동식물에 깃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루아흐는 씨앗을 발아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며, 포유류의 x, y 염색체가 만나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신비다. 루아흐는 또한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여러 달 동안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바다를 헤엄쳐서 산란지인 강 상류에 도착해 암컷이 구멍에 알을 낳으면 수컷이 그 위에 정자를 뿌려 수정시킨 뒤, 산란을 끝낸 암수 모두 지쳐서 죽고 마는 정교한 의례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의 법이다. 에스겔은 이제 신의 특성인 루아흐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만물이 바로 보이지 않는 루아흐에 의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스겔이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명령을 대언하니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루아흐, 즉 생기가 없었다. 인간이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그 안에 영혼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은 에스겔에게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에스겔서> 후반부에는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고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예언이 등장한다. 건축 계획, 크기, 건축 자재, 사제들을 위한 방, 의례, 종교 축제,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들 간의 부동산 분배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는다.

에스겔은 모든 세대에 말을 걸고 특히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는 영적인 용기라는 부인할 수 없는 힘과 숭고한 꿈이 필요하다. 1세기 예수 운동을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그리스-로마 세계로 소개해 그리스도교로 발전시킨 바울은 인간은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로마서> 8.24-2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성서는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 온 세상은 “혼돈하며 공허하고 어둠이 깊음 위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신의 첫 행동은 빛을 만들어 어둠을 쫓는 일이었다. 어둠과 밤은 신이 없는 세상을 상징한다. 에스겔이 목도한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른 뼈들 위에 힘줄과 살이 오르고 살갗으로 덮은 후 생기가 들어가 사람이 되어 움직인 것처럼, 엘리위젤은 아우슈비츠라는 또 다른 마른 뼈 골짜기에서 불가능하지만 바랄 수밖에 없는 미래, ‘희망’을 불렀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조망과 희망은 단순히 뼈, 힘줄, 살, 그리고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생기가 들어와야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내가 숨을 쉬고 있다. 누군가 내가 밤에 자는 동안에도 심장을 박동시켜 아침을 보게 만든다. 이 숨 쉬는 행위는 내가 살아 있다는 표식이다. 장마가 끝나고 들판에 벼가 익는 소리를 듣고 싶은 아침이다.

사진


<비오는 날, 파리>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

유화, 2,122 mm x 2,762 mm

시카고 예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