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4.(火曜日) “희망希望, 불가능 속에서 부는 노래”
신의 침묵에 절망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국가적인 재난에 신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인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에스겔은 구약성서의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며 신비한 예언자 중 한 명이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사제이자 사독의 자손인 부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스겔은 유다의 여호아킨 왕과 함께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멸망한 뒤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였다.
그는 바빌론에서 유대인들 안에 자리한 ‘절망’을 깊이 묵상했다. 그는 바빌로니아 남부에 있는 니푸르라는 도시의 그발 강 수로 사업에 투입되어 포로들과 함께 살았다. 포로들의 삶이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가 고된 노동을 하거나 노예로 지낸 것은 아니다. 그는 결혼해 자신의 집에서 살았으며 많은 저명한 손님들을 환대했다. 그는 종종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유대인들의 죄를 짊어지어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은 그들이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바빌로니아 풍습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점이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온 지 5년째 되던 해, 그발 강 둑에 앉아 신의 계시를 받는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병은 바로 절망이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대안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하루살이처럼 사는 동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충격적인 행동을 통해 희망을 보여줄 것을 계획한다.
에스겔은 예언자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유대인 포로에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려 노력한 신앙인이었다. 예언자들 가운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자신의 엉덩이를 내놓은 채 3년 동안 돌아다녔고, 예레미야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호세아는 창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에스겔만큼 자신의 상징적인 행동과 알레고리를 그의 삶의 전부로 만든 예언자는 없다. 에스겔은 자신의 기이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사지가 마비되거나 혀가 굳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에스겔서> 1장에는 하늘에 있는 왕좌가 등장한다. 이 왕좌에 대한 환상은 <에스겔서> 전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면이다. 신은 에스겔의 삶을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떤 ‘표식’이 되길 바란다. 에스겔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그는 오랫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자신의 몸을 묶고 침묵하기도 한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다른 포로들과 함께 있을 때 신이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었다. 다른 포로들은 에스겔처럼 환상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다. 에스겔은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더니 큰 구름이 밀려오고 불빛이 계속해서 번쩍이며 그 구름 둘레로 광채가 나고, 그 광채 한가운데에서 금붙이 같은 것이 번쩍이더니 그 안에서 사람처럼 생긴 생물의 형상을 보았다. 그리고 이 형상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앉아 있었다. 에스겔은 이 형상이 신이라 생각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신이 말한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다. (…) 비록 네가 가시와 찔레 속에서 살고, 전갈 떼 가운데서 살고 있더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오직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신은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를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죄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거룩한 공간인 예루살렘에만 가면 자신들이 신을 만나고 신의 축복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의 명령을 듣고 삶으로 실천하기 위한 목적을 상실한 채 형식적인 의례만 행하는 이스라엘인들을 벌주신 것이다.
신은 에스겔에게 신의 말씀을 내재화해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너 사람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어라”라고 말한다. 신의 말씀은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내재화해 내 삶으로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하늘에서 손 하나가 내려왔다. 자세히 보니 그 손 안에 두루마리 책이 한 권 있었다. 이전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았던 십계명과는 달리, 그 글들은 슬픈 노래와 재앙으로 가득했다. 신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아, 너에게 보여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주어라.”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전까지 거룩한 장소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신의 존재가 ‘두루마리’라는 책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신이 계신 곳은 장소가 아니라 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안에 있다는 교훈이다. 에스겔이 입을 벌리자 신이 그 두루마리를 먹여주며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히 채워라”라고 말한다. 신의 명령대로 두루마리를 먹은 에스겔은 그 두루마리가 “꿀같이 달았다”라고 기록한다. 실제로 두루마리가 꿀같이 단 것은 아니다. 신의 말씀대로 산다면 인생이 보람되고 달콤할 것이라는 은유다. 그는 신이 보여준 환상으로 그발 강가에서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인들과 7일 동안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 후에 신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너는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거라. (…) 사람들이 너를 포승으로 묶어놓아서, 네가 사람들에게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너를 벙어리로 만들어서, 그들을 꾸짖지도 못하게 하겠다.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다시 말할 때에, 네 입을 열어줄 것이니, 너는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에스겔은 포승줄로 묶인 채 방안에 갇혀 벙어리가 된다. 말을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의 강퍅함을 드러내기 위해 에스겔이 벙어리가 된 것이다. 그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390일 동안 한쪽으로 누워 있기도 했다.
그 후에는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듯한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그 앞에서 다시 다른 쪽으로 390일 동안 누워 있었다. 에스겔은 2년 넘게 누워 있으면서 자신의 민족이 당한 재난과 수모의 원인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한다. 심지어 신은 에스겔에게 밀가루 빵을 인간의 똥으로 만든 연료 위에서 굽도록 명령한다. 에스겔은 신에게, 자기 자신을 더럽힌 일도 없고, 저절로 죽거나 물려 죽은 짐승의 고기도 먹은 적이 없으며, 부정한 고기를 입에 넣은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신은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에 쇠똥으로 불을 피워 빵을 구워라!”라고 말한다. 신은 심지어 에스겔에게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과감히 행한다.
“나는 너의 눈에 들어 좋아하는 사람을 단번에 쳐 죽여, 너에게서 빼앗아 가겠다.
그래도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아라.”
에스겔이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한 뒤 저녁, 그의 아내가 죽었다. 에스겔은 바빌론 포로기를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이 이러한 재난을 받은 이유를 자신의 기이한 행동을 통해 전하고, 이들이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더 깊은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들은 이제 도저히 재생할 수 없는 시체들이며, 그것도 모자라 무수한 세월이 지난 마른 뼈들과 같았다. 마른 뼈와 같은 이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사진
<에스겔의 환상>
마타이우스 메리안 Matthaeus (Matthäus) Merian (1593-1650)의 성서 이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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