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누구인가? 혹은 신은 무엇인가? 혹은 신은 어떤 가치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해왔다. 서양종교에서는 신을 하늘에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존재로 흔히 묘사된다. 누가, 무엇이, 혹은 어떤 가치나 상태가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수많은 경전들과 고전들은 신을 창조주로 묘사한다. 아마도 가장 손쉬운 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창세기>는 “태초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 순간을 목격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사실이 아니라 고백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신이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매개로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가? 현자들은 창조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왔다. 그(녀)는 창조한 이미 있는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형變形 혹은 유출流出하는 자일수도 있고,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하는 자일 수 있다. 있음을 전제하는 창조 이전의 상태가 유출설이며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변화가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다.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없음’도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있음’의 하나이다. 인간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없음 자체를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철학자들도 신을 묘사하는 가장 중요한 은유로 ‘창조’라는 주제를 사용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에 대한 관찰을 기록한 <자연학>Physics 8권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담은 <형이상학>Metaphysics 12권에서, 우주의 특징인 ‘운동運動’으로 설명한다. 그는 우주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부동의 어떤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100m 단거리 선수가, 달기기 위해 출발선상에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고 힘을 축적하고 있는 멈춤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존재를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만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존재, 그리스어로는 ‘호 우 키노우메논 키네이’ὃ οὐ κινούμενον κινεῖ라고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운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이성적으로 설명해야했다. 단순히 빅뱅으로 없음에서 있음을 설명하기란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만물은 변한다’라는 철학으로 우주를 설명한 엘레아학파의 파르미데스Parminides의 우주관을 수용하여 당대 ‘무에서의 창조’를 주장하는 사상에 대항하여 “없음으로부터 오는 것은 없음이다” (그리스어로는 우덴 엑스 우데노스 οὐδὲν ἕξ οὐδενός, 라틴어로는 ‘엑스 니힐로 니릴 피트 ex nihilo nihil fit)는 주장을 수용하고, 우주가 시작이 있다면, 그 첫 번째는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잠재와 가능을 지닌 ’제1원인‘이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동의 동자’라는 개념은, 파르미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어 현대과학의 우주탄생이론인 ‘빅뱅’을 설명하는 근간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신에 대한 과학적이며 물질적인 설명과는 달리 성서의 <출애굽기>는 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신은 누구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신은 무엇을 한다’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3장은 모세가 시내산 (혹은 성서의 다른 책에서는 호렙산)에서 신과 마주치는 사건을 기록한다. <출애굽기> 전설에 의하면, 모세는 당시 떠돌이 노동자 집단인 ‘히브리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이집트 공주에 의해 나일강에서 구출되어 이집트 궁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동료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광야로 도망쳐 40년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목동으로 지냈다.
어느 날, 모세는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땅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 경내로 들어가, 경내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비한 광경을 경험한다. 가시덤불이 불에 타고 있지만 연소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한다. 그는 이 광경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자, 그 가시덤불에서 한 목소리를 듣는다.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샌달을 벗어라!” 그는 이 신비한 목소리를 듣고 두려운 나머지 얼굴을 땅에 대고 이 존재와 대화를 시작한다.
이 존재는 자신의 이름을 세 가지로 알려준다. ‘에흐에 아쉘 에흐헤’(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에흐에’(스스로 있는 자) 혹은 ‘야훼’(주). 이 세 명칭은 아리스토렐레스의 ‘우덴 엑스 우데노스’만큼 심오하다. 신은 이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먼저 자신이 해왔던 일을 알려준다. 이 존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새로운 신의 모습을 <출애굽기> 3.7에 기록되어있다.
וַיֹּ֣אמֶר יְהוָ֔ה רָאֹ֥ה רָאִ֛יתִי אֶת־עֳנִ֥י עַמִּ֖י אֲשֶׁ֣ר בְּמִצְרָ֑יִם
וְאֶת־צַעֲקָתָ֤ם שָׁמַ֙עְתִּי֙ מִפְּנֵ֣י נֹֽגְשָׂ֔יו כִּ֥י יָדַ֖עְתִּי אֶת־מַכְאֹבָֽיו
“야훼가 말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불행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그들의 공사감독관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야훼’라는 신명을 포함한 다른 세 신명은 <출애굽기> 3.14-15에 처음 소개된다. 분명 이 중요한 대목을 마지막으로 기록한 편집자가 ‘야훼’이 3.15에 등장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미리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무명의 히브리 저자는 신을 추상적인 관념이나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신의 속성으로 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한다.
이 새로운 신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된 동원된 이주노동자들인 히브리인들이 ‘야훼’라는 이름을 신을 신봉하기 전에, 그들의 불행을 두 눈으로 분명히 목도했고 두 귀를 분명히 들었다. 이 신은 인간의 삶과 유리된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철학자들의 신이 아니라,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사회의 가장 불쌍한 계층의 불행에 관심이 있는 신이다. 심지어, 고통을 받는 자들이 신을 믿는냐 혹은 믿지 않느냐도 상관이 없다. 그 신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3.7의 후반부에 등장한 문장인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라는 문장은 심오하다,
신은 이들의 ‘고통苦痛’(히브리어 ‘마크오브’makʿôb)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신은 그들이 아프면 자신도 아픈 존재다. 성서저자는 이 공감의 능력을 ‘안다’라는 의미를 지닌 ‘야다’(yādaʿ)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이용하여 표현한다. ‘야다’라는 동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희노애락을 자신의 희노애락처럼 실제로 느끼는 능력을 표시하는 단어다. 그것은 간난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아이가 아프면, 자신도 아픈 순수한 마음인 자비慈悲다. 신은 누구인가? 신의 특징은 무엇인가? 아니 신은 어떤 관계에서 등장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면, 이 둘 사이에 신이 존재한다. 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가 신인가?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신은 누구인가? 지구 저편에 있는 모른 사람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신은 누구인가? 학대를 당하는 동물들, 훼손당하는 자연환경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존재다. COVID-19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그것을 경감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지닌 의료진이신적이다. 신은 인간들이 만든 건물이나 책에 존재하는 우상이 아니다. 종교인이나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 종교인 행세를 하거나 특정 건물에 자주 가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인 행위, 즉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사진
<불타는 가시덤불>
프랑스 화가 세바스티앙 부르동(1616–1671)
유화, 28.7 × 18.8 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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