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내가 키우는 반려견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반려견들의 고통에 대한 고민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다른 인간들의 고통에 반응한다. 그(녀)는 역지사지하여 그 고통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한다. 특히 인간은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생각과 경험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은 종교와 신화를 만드는 능력이다. 오늘날 신화적 사고는 비이성적이며 자가당착적이라고 폄하된다. 그러나 상상력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창안하고 상상하지도 못한 기술을 발명하는 원동력이다. 과학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신화는 인간이 인생을 강렬하고 의미가 있게 사는데 필수적이다.
과학은 분명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 원천이다. 특히 18세기부터 서구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과학혁명은 인간을 단순히 생존하는 동물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고 누리는 문화적인 인간으로 변모시켰다.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풍요한 삶을 위해 ‘여유’와 ‘여가’를 향유하게 되었다. ‘여유’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씨앗을 뿌려, 더 많은 발명과 발견을 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현미경, 망원경,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로봇 등 수많은 문명들은 창조적인 소수가 자신에게 몰입하는 ‘여유’를 통해 우연히 발견된 것들이다.
근대인류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로 진입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경쟁으로 이루어낸 효율성과 최적의 전략을 산출하는 이성은 오히려 빈부의 격차를 심화하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인류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각 링 위에서 힘을 겨뤄야만했다. 이 비정한 경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가공할 만한 ‘힘’을 바탕으로 휘두르는 ‘폭력’이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평가 절하되기 시작한 것이 있다. 이것은 인류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삶의 동력을 선물하이였다.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자연의 알 수 없는 섭리와 같다.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을 나게 하고 줄기를 내며, 시절을 쫓아 꽃과 열매를 만개한다. 이 모든 과정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농부는 가장 좋은 씨앗을 찾아 땅을 개간하고 정성을 다해 나무를 가꾸고, 기다린다. 농부는 자연의 섭리를 믿는다. 자신은 어떤 경로로 곡식과 열매를 맺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조그만 씨앗이 커다란 과실로 변했다는 기적을 믿는다.
이야기는 인류 문명을 꽃피우게 만드는 씨앗이자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다.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혹독한 빙하시대를 거의 이십만년동안 견디면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동료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신이 사냥한 이야기, 거대한 산과 강에서 살아남은 모험담, 맘모스나 곰을 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변하면서 현생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부터 사 만년전 일이다.
현생인류는 자신의 경험담을 넘어서 오감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세계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여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들은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고 놀라 누군가 하늘에 예술작품을 남겨놓았다고 상상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과 별똥을 보면서, 너무 감격하여 가만히 앉아 울기만 했을 것이다. 자연은 자신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하늘과 땅을 만들었을까? 누가 저 흉흉한 바다를 창조하여, 금을 그어놓고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인간’이란 동물을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끝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인가? 누가 ‘불’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담은 그릇을 ‘이야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특히 삼라만상의 기원을 다른 이야기를 ‘신화’라고 부른다.
현대인들은 ‘신화’를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쯤으로 생각한다. 갈릴레이의 지동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우주창조에 관한 빅뱅이론 등과 같은 첨단이론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이 주장들을 터무니없는 ‘신화’로 여겼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과학적인 주장들은 주장일 뿐이지,100년 후 시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과학적인 수준에서 잠시 ‘참’일 뿐이다. 신화는 믿을 수 없는 거짓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경험할 수 없는 지경으로 인도하는 등불이다. 인생이란 자신을 주인공으로 신나는 이야기를 펼치는 신화-만들기다.
사진
<프로메테우스>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모로 (1826–1898)
유화, 1868, 205 cm x 122 cm
파리 구스타브 모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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