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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19 (水曜日) “최선最善”

인간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천직이라고 여기고 몰입할 때, ‘최선’이다. 최고의 선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이상과 일치하여,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이 곧 목적이며. 목적을 목적으로 여기지 않고 또 다른 과정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란 억지로 무리해서 성취한 일이 아니라, 그(녀)가 일상에서 최선을 경주하여 하는 일이다.

인류의 현자들을 질문을 통해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을 훈련시킨다. 배움은 깊은 들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목소리를 청취하려고 수련한 사람은, 타인의 말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있다. 예수의 질문은 철학적으로 난해한 질문이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물건이나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첫 질문은 의식주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의식주를 확보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 인생의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의식주와 관계된 질문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당신은 왜 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어렵고 당황스럽게 여긴다. 가장 큰 이유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걱정하지 말라며 충격적인 요구를 한다. 이어서 예수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한다.

신은 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매가 높이 솟아올라서 남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 네게서 배운 것이냐?

독수리가 하늘 높이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네 명령을 따른 것이냐?

독수리가 바위에 집을 짓고 거기에서 자고 험한 바위와 요새 위에 살면서 거기에서 먹이를 살핀다.

그의 눈은 멀리서도 먹이를 알아본다.

독수리 새끼는 피를 빨아먹고 산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

세상에는 1만 종 이상의 새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따라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새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새들은 인간처럼 농사를 짓지도 않는다.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두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신비로운 이동을 하면서 산다.

들에 핀 야생화들도 그렇다. 식물들은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드러내고 변모하기 위해 수많은 우주의 힘들에 의지한다. 이 우주의 힘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백합화 안에는 하늘의 구름이 담겨져 있다. 구름이 없다면 비도 안 올 것이다. 그러면 그 장소에 떨어진 백합화 씨가 발아되지 않았을 것이다. 백합화 안에는 햇빛이 있다. 햇빛이 가져다주는 따뜻함 없이 스스로 자라날 꽃은 없기 때문이다. 백합화 안에는 인간의 의지와 수고가 숨어있다. 백합화는 138억년전 일어났던 빅뱅의 결과물이다. 영겁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끈질기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온 진화의 최첨단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물리적, 화학적, 인위적 조건들의 결정체이다. 누군가에 의해 한 순간에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과 섭리를 품은 신비한 존재다. 햇빛 없이는, 바람 없이는, 비 없이는, 공기 없이는, 미네랄 없이는 백합화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백합화 바라보는 행위는 우주의 비밀을 훔쳐보는 행위다. 백합화는 땅이며, 구름이고, 비이며 농부다. 백합화는 우주를 품고 있다.

백합화의 씨앗은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적당한 온도, 수분, 공기, 산소들이 합쳐져 그 시커먼 씨앗이 조금씩 갈라져 싹이 트고 흙을 헤집고 나와 고개를 내민다. 그 싹은 줄기를 내고 봉우리가 되고 3년 정도 지나면 꽃을 피운다. 예수는 수많은 꽃들이 씨에서부터 나와 봉우리가 되고 꽃을 피우는 그 신비한 과정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말한다. 예수는 말한다.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마태복음> 6:28~29

예수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소유했던 솔로몬의 영광도 이 무명의 백합꽃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내일이면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신이 이렇게 화려하게 입히시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느냐고 나무란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충고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예수는 우리 삶에 있어서 의식주의 해결보다 근본적인 임무인 “신의 나라”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신이 요구하는 의”를 행하라고 주문한다.

‘신의 나라’는 신의 뜻이 널리 그득 찬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원칙이 지켜지는 경지를 의미한다. 신의 원칙은 바로 그 뒤에 등장하는 “신이 요구하는 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의’란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자연에서 신의 흔적을 찾아 경외심을 갖는 이웃과 자연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다.

우리는 신이 요구하는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의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새가 낳은 조그만 알에서 매년 8만 킬로미터 이상 이주하는 북극제비갈매기를 보고, 조그만 씨앗에서 그 아름다운 백합화를 만드는 자연의 법칙을 보며 감탄한다. 인간의 DNA 속에 신의 인지를 숨겨 놓음으로써 순간의 삶에서 꼭 이루어야 할 의를 찾도록 한 신의 섭리가 무엇인지 묵상해볼 일이다. 백합화를 비롯한 모든 식물과 동물의 힘은 누구를 흉내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합화는 복사본이 없고, 뭐 하는 척도 하지 않으며,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꾸미지도 않는다. 자기 생김새 그대로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나는 오늘 나라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사진

<수련>

미국 사진작가 카틴카 메슨Katinka Matson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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