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7.(月曜日) “미덕과시美德誇示”
인류는 한 치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COVID-19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감염병 전문 과학자는 이 질병은 감기처럼, 인류가 영원히 대처해야할 일상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진단하였다. COVID-19은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만들었던 일상의 문화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폐기시키고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떠나서 홀로 지낼 수 없다. 그(녀)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지닌 전체의 부분이다. 만일 그가 자신만의 섬에서 독립적으로 살기를 시도한다면, 그는 생명으로서 자기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누군가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이 세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 존재의미를 망각하고, 공동체가 요구하는 삶에 매몰된다면, 그는 생명이 아니라 기계의 한 부품이다.
우리가 지닌 이 이중성, 즉 자립성과 부분성을 조화롭게 풀어 나갈 때, 우리는 행복하다. 인간을 구성하는 이중나선을 오래전에 이해하고 ‘현대적인 삶’을 예언한 철학자가 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다. 그는 자신을 ‘철학적 의사’라고 믿었다. 그의 임무는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을 적나라하게 알리고, 그들의 오염된 가치체계를 치료하는 의사다. 니체는 <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라는 책에서 자신의 임무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속한 (문제가 있는) 부분에 수술용 칼을 여지없이 갖다 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하는 일종의 자선행위입니다.”
니체는 19세기말 인류가 자신이 철학적 진단을 수용할 정도로 관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천재적인 인간들은 항상 시대를 앞서 태어나 오해와 질시의 대상이 되어 어려운 삶을 살기 마련이다. 니체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대부분의 동시대 인간들은 그를 지기환상에 빠진 불쌍한 인간으로 폄하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100년 전 글을 다시 곡 씹어 보면, 그의 생각들은 현대적일 뿐만 아니라 탈현대적이기도까지도 하다.
21세기 문화와 문명의 모체는 IT의 등장이다. 우리는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한다. 현대인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디지털 중독자가 되었다.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이 중독이 우리에게 끼칠 영향은 두고 봐야할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오감을 통해 얻는 직접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편집원칙을 통해 창작된 컴퓨터 정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의 정보는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정보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다.
미국 작가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원제: <얕은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 뇌에 하는 것들>
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이란 책에서 인류는 우리가 지난 4000년 동안 일구어 왔던 문명과 문화의 생성방식을 해체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우리는 각자가 구별된 습관을 통해 인류의 고전, 관찰, 탐험들을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구글이나 위키피디아가 제공하는 정보정글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냥-채집’하고 있다. 인터넷은 현대인들을 은유적으로 정착-농경민이 아니라 사냥-채집-유목민으로 머나먼 과거로 돌려놓고 있다.
우리의 인터넷 활동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런 활동은 누군가 정해놓은 미궁과 같은 함정 안에서의 놀이에 불과하다, IT혁명이 야기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IT세계에서는 익명의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진리’다, 이 진리를 신봉해야, 부와 명성이 따라온다. 숙고를 실천하는 개인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IT세계의 출현으로, 익명의 대중의 생각이 선이며 다수결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세뇌시킨다. 그들은 그것이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사항이라면, ‘진리’라고 신봉한다.
니체는 <선과 악을 넘어서>에서 그런 대중들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광란은 개인들에서는 드믄 어떤 것이다.
그러나 집단, 정당, 사람들, 같은 또래에서는 광란이 법이다.”
그런 예시는 차고 넘친다.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그 대표족인 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민중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탐구가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1세기 유대 군중들과 로마제국은 그의 파격적인 가르침이 자신들의 종교와 사회의 근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그를 십자가-처형하였다. 핸드폰과 소셜 미디어는 이런 대중의 광란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우리가 이 대중에 동조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 광장에 나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지구의 끝 오지에서도 광란을 통해 상호가 동의한 적당한 희생양을 찾아 분노를 표출한다. 현대인들은 이 광란으로 인간의 욕망, 고약한 시샘, 심술궂은 보복심, 그리고 자만심을 만족시킨다.
니체는 <우상들의 황혼>이라는 글에서 이 불쌍한 영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불쌍하고 사악한 자들은 타인에게 호통치고 나무라는데 쾌락을 느낀다.
그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권력의 맛을 본다.
모든 불평과 곡하는 소리는,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위안한다.
모든 불만과 불평에는 약간의 복수가 스며있다.
인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감정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다.”
인간만이 동물들 중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그 잔인성殘忍性은 인간의 정신적인 유전자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아, 지금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쁨 중에 하나가 되었다. n 대중들이, 혹은 대중들을 등에 업고 탄생한 정권은, 자신들의 잔인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미덕과시美德誇示’를 사용한다. 다윈적 인간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두 가지 원칙으로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이기적인 인간은 자신의 언행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착각한다. ‘미덕과시’는 자신의 무식을 미덕으로 치장하여 과시하는 만용이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미덕과시’의 환자들이다. 그런 치장은 자신과 다른 가치와 의견을 지닌 개인이나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이들은 ‘미덕과시’라는 정신질환적인 자가당착을 통해 겉으로는 대중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무식을 기반으로 한 악의를 숨긴다.
니체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는 <정의로운 사람들Les Justes>라는 1949년 희곡에서 1905년 제정러시아 대공 세르게아 알렉산드로비치를 암살사건을 다룬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이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덕과시’를 여지없이 발휘한다. 카뮈는 말한다.
“대중을 사랑하는 인도적인 감정은 항상 인류에 대한 혐오 뒤에서 나온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미덕과시는 예수가 살던 시대에도 있었다. 예수는 위선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이 설교하는 것을 행동으로 연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수 있는 방법을 안다. 미덕을 전시하고 과시하는 사람은, 정작 가슴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타인복수를 위장한다. 미덕과시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약자들이 사용하는 권력욕심의 수단이다. 그런 자들은 항상 누군가를 단두대에 세우기 위해 의혹을 제기하고 스스로 독설을 품고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착각한다. 나는 나의 미덕을 자랑하고 타인의 약점을 비난하는가? 아니면 나의 약점을 발견하여 수정하고 타인의 언행을 타산지석으로 삼는가?
사진
<제2차 세계 코민테른대회에서 연설하는 레닌>
유화, 1924, 320 cm x 532 cm
모스코바 국립역사박물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