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6.(日曜日) “허접한 말”
종교인들은 자신들을 비종교인들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교리敎理를 만들었다. 교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외부인들과의 구별을 명확하게 표시하는 경제적이며 배타적인 문장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 특히 종교 주도권에 위협이 되는 집단이나 개인을 이단異端으로 낙인찍어 출교시킨다. 붓다는 힌두교에서, 예수는 유대교에서 이단이었다.
COVID-19상황에서 종교인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안녕을 증진시키고 삶의 희망의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의 이름을 가장한 ‘이익집단’이다. 종교는 동물상태의 인류를 지혜를 흠모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시키면서, 중요한 가치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았다. 주요종교들의 공통된 가치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며, 우리는 이 마음을 ‘사랑’, ‘자비’, ‘용서’, ‘배려’라고 부른다.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정의正義’가 필수적이지만, 인간답게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비慈悲’가 필수적이다.
1세기 유대사회에는 다양한 교파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사제귀족 계급들이 중심이 된 ‘사두개인’, 전해 내려온 경전에 대한 해석을 중요시한 ‘바리새인’, 로마제국아래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메시아의 등장과 심판을 원하는 종말집단인 ‘에세네파’, 그리고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온다고 믿는 ‘영지주의’, 그리고 신은 성전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기에, 인간은 신이라고 주장한 신흥 종교인 ‘예수운동’이다. 이 운동은 심지어 자신이 혐오하는 원수의 마음속에도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주장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점점 인기를 얻은 예수운동을 가장 혐오하였다. ‘바리새인’은 히브리어 동사 ‘파라슈’pāraš에서 유래했다. ‘파라슈’는 ‘구별하다; 분석하다’라는 의미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유대교 정체성을 고수한 유일한 전통은 자신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전인 ‘토라’에 대한 해석과 해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유대인들은 맨 처음 신은 예루살렘이라는 ‘성전聖殿’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자, 신은 건물이 아니라 책인 ‘성전聖典’에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들의 경전인 토라,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는 기원전 6-4세기에 제작되었다.
신이 건물인 ‘성전聖殿’에서 경전인 ‘성전聖典’으로 이주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팔레스타인이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으로 헬레니즘의 영향아래 놓이자, 유대인들은 다시 한 번 신을 이주移住시킨다. 헬레니즘은 히브리와 아람어를 문어와 구어로 말살하고 그리스어를 강요하였다. 유대학자들은 유대정체성은 단순히 경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대한 해석을 아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경전에 자세한 해석과 해설을 달았다 탈무드를 제작하였다. 그들에게 신은 경전에 대한 심오하고 거룩한 해석인 ‘성해聖解’안에 숨어있다고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경전에 대한 해석 전문가들이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서 유대인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한 종교법을 만든다. 그 중교법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식법 ‘코셔kosher’다. 코셔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특히 외국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바리새인들에게 무슨 음식을 먹느냐는, 그 사람의 종교성과 신실함의 상징이었다.
예수는 ‘음식법’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바리세인들의 교리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마태복음>15.10-11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 Καὶ προσκαλεσάμενος τὸν ὄχλον εἶπεν αὐτοῖς Ἀκούετε καὶ συνίετε·
10. (예수가) 군중들을 부른 후 그들에게 말했다. “듣고 이해하십시오!
11. οὐ τὸ εἰσερχόμενον εἰς τὸ στόμα κοινοῖ τὸν ἄνθρωπον, ἀλλὰ τὸ ἐκπορευόμενον ἐκ τοῦ στόματος τοῦτο κοινοῖ τὸν ἄνθρωπον.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허접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사람을 허접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에게 듣는 행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이며,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지적하고 비난하기 위한 준비다. ‘듣는 행위’는 타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을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경청이어야 한다. ‘정답’만을 찾는 교육을 받는 우리는, 항상 그것을 옳은지 그른지를 판가름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이 여유를 가지는 것이 이해다.
<마태복음> 저자는 ‘수니에미’συνίημι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이해하다’를 표현하였다. 이 단어의 원래 뜻은 ‘함께’(συν) ‘보내다’(ίημι)의 합성어로 상대방의 말을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처지로 자신을 함께 보내는 행위다. 자신에게 익숙한 주파수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파수에 나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배려다.
예수는 당시 유대지식인인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허용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을 허접하게 혹은 불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생겨나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그를 허접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의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그의 마음이 악의, 살기, 간음, 음란, 도적, 거짓증언, 중상모략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입을 통해서 이 악의를 쏟아낼 것이다. 내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거나 종교적으로 금지된 음식을 먹어, 사람이 허접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기생하고 있는 악와 그것의 가감이 없는 표현인 말이, 그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저자는 그리스어 ‘코이노오’κοινόω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허접하게 만들다; 더럽히다’라는 의미를 표현한다. 이 단어는 ‘일상; 보통’이라는 의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구별하지 않는; 오염된’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내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악의 발견하여 축출하는 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입에서 무심코 나오는 말은 ‘허접할 수’ 밖에 없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더럽히는 것은, 정제되지 않고 절제하지 않는 말이다. 나는 오늘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사진
<예언자 예레미아>
미켈란젤로 (1475–1564)
프레스코, 1511
로마 시스티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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