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5 (土曜日) “수용능력收用能力”
우리는 ‘나-중심’주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나’라는 대명사를 1인칭으로서의 주체로 사용하고 ‘자기-자신’을 ‘나’로부터 탈출하여 거의 3인칭이 된 ‘나’로 사용한다. 1인칭으로서 ‘나’라는 생존방식은 ‘이기주의’지만, 3인칭으로 ‘나’의 생존방식은 ‘이타심’이다. 3인칭으로서 자신을 응시하고 개선할 여지가 있는 사람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윈주의가 주장하는 ‘진화’라는 용어는 과학적인 용어다. 이 생물학적 개념은 엄격하게 결정론적이며 환원적으로 흑과 백이 명확히 구분된다. 옳고 그름만 존재할 뿐이다. 최근 과학계에선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신-다윈주의가 등장하였다. 진화의 주체는 ‘이기적 유전자’이며 유전자를 담고 있고 있는 유기체인 인간은 유전자가 가차 없이 번식하는 숙주일 뿐이다.
영국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설교한다. 그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생존 기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화된 로봇 도구입니다. 이 유전자의 이기심selfishness이 인간 개인행동의 이기심을 일반적으로 초래합니다.” 신-다윈주의 시대의 복음은 ‘이기심’이다.
도킨스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가 진화한다고 믿는다. 대표적으로 미국 생물학자 마크 커슈너와 존 게하트는 <생명의 개연성>이란 책에서 유기체가 진화의 변이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기체가 진화과정에서 생물의 유전적인 형태와 생리적인 성질인 표현형表現型의 생산에 참여한다.” 인간문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징이나 행동들은 유전자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의식과 의지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다. 유기체는 자신의 진화를 위한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든다. 이런 의도적인 환경조성을 ‘니취 컨스트럭션’niche construction. 굳이 번역하자면 ‘틈새환경 조성’이라고 부른다.
‘틈새환경조성’이란 개념은 유기체가 자신이 거주하는 환경을 변형시킨다는 의미다. 유기체가 환경에 영향을 주면, 그 변화는 다시 어떤 형질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에 개입한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면, ‘틈새환경 조성’은 목적-지향적이다. 유기체는 스스로 배우고 그 배움으로 자신이 거주할 환경을 변화시킨다.
몇몇 진화생물학자들의 과학적인 설명이나 인문학자들의 설명으론 정교하고 복잡한 인간문화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는 수십억년동안 진행된 우주의 생성과 생물의 진화과정을 ‘경외’로 표현하였다. 자신의 능력으론 설명할 수 없고 그저 그 앞에서 존경심을 표현할 뿐이다. 도킨스는 이 진화과정을 무의미로 설명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우리가 예상한 그런 특징들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만일 그 기저에 특징이 있다면, 디자인도, 의도도, 선도, 악도 없고 단순히 맹목적이며 매정한 무관심일 뿐이다.” 도킨스의 주장은 일종의 종교적 신념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이 누구인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인류에게 일어난 사실에 관한 호기심과 그것을 알려는 다양하고 겸손한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동식물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 틀에 소개한다. 그는 그 틀을 ‘수용능력’이라고 부른다, 항상 새롭게 생기고 확장한다. 지구에 생물이 생존가능하게 한 수용능력들이 있다. 지구에 광합성작용으로 산소가 만들어진 수용능력, 단세포 생명체에서 수십억 년을 거쳐 정교하고 복잡한 유기체로 변한 수용능력, 조류와 포유류가 체내에서 발생하는 대사열로 외부의 기온과는 별도로 스스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려는 내온성이라는 수용능력, 포유류들은 태어난 후 자신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자신의 부모에 보살핌에 의존하는 수용능력, 사족보행을 하다 두족보행을 통해 생존을 강화하는 수용능력, 도구를 만들어 사냥을 손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수용능력, 불을 발견하여 사냥한 음식을 구어 먹어 뇌를 크게 만들어 생각할 수 있는 유인원이 된 수용능력 등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원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노력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우리사회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창조적인 틀을 찾아야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용능력’은 무엇인가? 스스로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를 시공간을 통해 전하는 수용능력을 지닌 존재가 생명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신(神)도 바로 생명이다.
성서 <출애굽기>에서 신은 자신의 속성을 모세를 통해 드러낸다. 모세는 오랫동안 묵상과 관찰을 통해 신비의 세계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하루는 가시덤불로 다가가자 그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목소리로만 들려오는 신에게 모세는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란 그것을 지닌 존재를 규명하는 언표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신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고전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스스로 있는 자’의 고전 히브리어는 ‘에흐에’라는 한 단어다. 에흐에는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하야’의 1인칭 단수 미완료형 동사다. 에흐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를 풀면 ‘나는 스스로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그리고 미래에서도 존재하는 자’ 정도일 것이다. 에흐에는 생명의 본질인 자기보존 체제를 가장 간략하고 심오하게 설명해주는 단어다.
생명의 기원이나 과정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시도는 신화적인 수준을 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이 무슨 의미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함으로써 생명에 숨겨진 진리를 조금씩 알아간다. 생명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인간이 빅뱅의 순간에 만들어진 우주의 재료로 탄생했으며, 인간의 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자기보전체인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생명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연하게 존재하는 능력이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 종속되거나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설령 어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하더라도 스스로 견뎌내는 인내다.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면 우주로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사진
<꽃으로 덮인 강둑>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유화, 1877, 53.8 cm x 65.1 cm
일본 하코네 폴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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