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3 (木曜日) “이별離別”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개척할 때 행복하다.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은,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찾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할 장애물이다. 30여년 전, 나를 보호하던 가족을 떠나 머나먼 땅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기숙사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종교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티벳에서 유학 온 라마승,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이슬람 사제 이맘, 미국 조지아출신 흑인목사, 무신론자 등을 만나면서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며, 그 세계는 틀리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다르고 심지어 내가 운명적으로 접한 세계와 종교보다 우월하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런 도반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가 아는 세계가 유일한 참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로 어리석게 인생을 살 뻔했다.
나의 분리는 세상에 존재하난 다양하고 훌륭한 다름에 대해 개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나의 전통을 새로운 시선에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돌아온 탕자’라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들 중 <누가복음>에서만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11. Εἶπεν δέ Ἄνθρωπός τις εἶχεν δύο υἱούς.
그(예수)가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καὶ εἶπεν ὁ νεώτερος αὐτῶν τῷ πατρί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Πάτερ, δός μοι τὸ ἐπιβάλλον μέρος τῆς οὐσίας.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ὁ δὲ διεῖλεν αὐτοῖς τὸν βίον.
그러자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누가복음 저자는 소위 ‘탕자의 비유’를 아무런 배경설명없이 갑자기 시작한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상징되는 고향을 느닷없이 떠난다. 왜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요구했는가? 이 요구가 얼마나 충격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몫’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먼저 밝혀야 한다.
몫은 그리스어로 ‘메로스μέρος’이며 ‘할당/운명/전체 중 한 부분’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가 구어로 사용하던 아람어로 그리스어 ‘메로스’를 역추적하면 ‘나흘라(nahlah)’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할라’다. 나흘라는 보통 ‘유산(遺産)’으로 번역된다. ‘나할라’란 신이 인간에게 가족 단위로 할당한 재산이다. 이 재산은 동산과 부동산 모두를 포함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양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이 주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직계가족/가정’이라는 의미의 ‘바이트(bayit)’다. 부모와 직계 자녀로 이루어진 바이트는 자신들에게 할당된 나흘라가 있다. 이 나흘라는 그 가족에게 할당된 유산이며, 바이트보다 큰 단위는 8촌까지 포함하는 ‘미쉬파하’다. 흔히 ‘친족’으로 번역되는 미쉬파하도 그들에게 할당된 나흘라가 있다. 미쉬파하의 나흘라는 수십 개의 ‘바이트 나흘라’로 구성된다. 미쉬파하 위에는 부족의 나흘라가 있고, 부족의 나할라 위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나흘라가 있다.
작은아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행위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근간인 나흘라를 파괴한다. 특히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사회의 관습을 무시하는 행위를 넘어 신성모독이며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겠다는 협박이다. 나흘라는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에게도 넘어가도록 되어 있는 수천 년간 이어진 전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라는 주장은 “아버지! 저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못 기다리겠습니다. 나흘라를 내주십시오. 저는 당신과 인연을 끊겠습니다”라는 말과 같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행위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전통과의 충격적인 단절을 의미한다. 유목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버리는 행위는 반역이며 범죄다.
작은아들이 고향을 떠나 향한 곳은 ‘먼 지방’이다. 먼 지방은 아버지 집과는 달리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으로 살아남는 장소다. 이곳은 또한 모든 사람이 권력과 돈, 그리고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심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순간의 쾌락을 위한 유혹이 난무한다. 쾌락은 이곳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이다. 작은 아들은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인간이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로부터 스스로 분리를 시도함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만일 작은 아들이 부모 밑에서만 생활했다면, 큰 아들처럼,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기만을 원하는 우물안 이기적인 인간으로 서서히 굳어졌을 것이다. 단절은 재결합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여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말하는 ‘익숙한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미국 화가 토마스 호벤덴Thomas Hovenden(1840-1895)의 <가족과 단절>Breaking Family Ties라는 작품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위에 손을 올려놓고 사랑 반, 근신 반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들이 이제 자립하기 위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참이다. 아들은 저 멀리는 응시하지만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의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아련한 눈으로 아들을 쳐다본다. 심지어는 그 앞에 앉아 있는 반려견 조차 떠나지 말라고 눈으로 애원하고 있다. 방안은 이별의 슬픔으로 가득 차있다. 아들의 아버지는 방 입구에 서있는 운전수에게 넘길 여행 가방을 왼손에 들고 있다. 운전수가 방 입구까지 온 것을 보니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러 넉넉하지 않는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아들은 대도시로 갈참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를 단절하는 일은 두렵지만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운전수가 있는 자리는 햇빛으로 가득 차있다. 이별은 재결합을 위한 과정이다. 나는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는가? 아니면 이별을 연습하여, 익숙한 세계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가?
사진
<가족과 단절>
미국 화가 토마스 호벤덴Thomas Hovenden(1840-1895)
유화, 1890, 132.4 × 183.5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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