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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11. (火曜日) “명상瞑想”

2020.8.11. (火曜日) “명상瞑想”

우주를 움직이는 것은 조용하다. 조용은 그 작동하는 힘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조용은,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를 성장시킨다. 시끄러움은 무엇인가 잘못 가고 있다는 증거다. 어떤 사람이 자주 문제를 일으키거나 공동체가 광장에 모여 허구한 날 시끄러 소리를 낸다면, 그 사람은 자기수련이 부족하고 그 사회는 후진적이다.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조용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절제를 오래 수련해야, 사람이나 사회가 조용해진다.

조용하다는 것은 그 주체가 더 나은 자신을 창출하기 위해 몰입중이라는 표식이다. 우주에서 가장 폭력적일 것 같은 천체들이 블랙홀 주위를 상상이상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지만, 들리는 소리는 침묵뿐이다. 지구가 태양을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고 회전하고 있지만, 지구라는 우주선에 올라탄 우리는 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다. 천체뿐만 아니라,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자력이나 전기와 같은 역학에너지의 특징도 조용함이다.

인간의 육체적인 힘도 마찬가지다. 오랜 수련을 통해 몸을 단련한 수영선수나 마라톤선수의 움직임을 날렵하고 조용하다. 만일 수영선수가 움직임이 둔탁하여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물이 많이 튄다면, 그는 초보자다. 만일 마라톤선수의 손이나 몸이 좌우로 많이 흔들거린다면, 그는 결승점이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할 것이다. 육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힘이나 영적인 힘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조용하지 못한 이유는 강물에 떠있는 지푸라기와 같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이리저리 방황하기 때문이다. 조용은 자신의 이기심을 확인하고 제거하여, 자신을 3인칭으로 보아 개선된 자신으로 훈련시키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배려를 습득할 때, 찾아온다.

전쟁, 파업, 분쟁, 대립 더 나아가 반목, 시기, 부러움과 같은 적폐는, 조용을 수련하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자신이 조용을 수련하지 못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주는 기원전 6세기 히브리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빛이 있으라!”라는 조용한 생각이 빅뱅이 되어 탄생하였다. 우주는 마음 속 생각과 의도의 가시적인 성과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는, 누군가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물건으로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곧 사건이 된다. <요한복음> 저자는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고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였다.

과학자, 발명가, 작가, 건축가, 무용가, 작곡가는 맨 처음 자신의 작품을 생각으로 설계한다. 그런 후 자신의 생각차원 평면도를 입체적으로 상상하여 그 안에 들어갈 부분가 부품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배치한다. 이런 창조적인 배치를 그리스인들은 ‘테크네’technē라고 불렀고 로마인들은 ‘아르스’ars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창안자는 자신의 생각차원의 평면도를 2차원의 평면도와 3D모형으로 제작한 후에, 실제크기의 물질로 전환시킨다.

만일 생각이 조용과 침묵으로 담금질된다면, 생각의 결과는 구현具現도 그 조용이라는 원칙으로 조화롭고 평온하다. 만일 생각이 서투르거나 시끄럽다면, 그 결과도 부자연스럽고 허접하여 결국 자멸하고 말 것이다. 생각을 침묵으로 진입시키는 행위가 ‘명상瞑想·’이다.

파탄잘리는 <요사수트라> 훈련경 11에서 명상의 쓰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ध्यान हेयाः तद्वृत्तय

dhyāna heyāḥ tad-vr̥ttayaḥ

드야나 헤야흐 타드-브릿타야흐

(직역)

“명상은 이 잡념들을 제가할 수 있다.”

(의역)

“요가수련자는 명상을 통해 자신이 제거하고 싶은

강의 물결과 같은 잡념에서 일어나는 잡념들을 제거할 수 있다.”

이 문구는 요가수련자의 삼매경 진입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훼방꾼을 제거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 유일한 방법이 ‘명상瞑想’이다. 명상이란 산스크리트 단어 ‘드야나’dhyāna는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에 온 마음과 정성을 집중하는 마음 챙김이다. 요가수련자는 신체를 단련하는 운동선수처럼,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마음을 절제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과정을 통해 서서히 조각되어지는 마음이 ‘드야나’다.


만일 내가 한 물건, 한 사람, 한 개념에 온 정성을 쏟으면, 나는 그 대상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 대상은 세상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초월하여, 그것 자체로 빛이 나는 어떤 것이 된다. 수련자는 그것에 자신의 존재마저 잃은 채 몰입하게 된다. 불경이 기록된 팔리어에서 드야나는 ‘자나(jhana)'가 돼 ‘생각하다, 명상하다’라는 뜻이 됐다.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드야나’는 ‘선(禪)'으로도 번역됐다. 드야나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정렬하다’란 의미의 인도-유럽어 *dheh-에서 유래했다. 드야나는 자신의 마음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연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집중하는 정성이다. ‘명상’이란 자신을 무한한 우주 안에서 유한한 한 점으로, 무한한 우주를 머금은 거대하면서도 지극히 작은 한 점으로 보는 수련이다.

나는 오늘 내 생각을 장악하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을 몰입시켜 명상으로 전환시키고 있는가? 명상이라는 호수의 심연엔, 내가 오늘을 아름답고 의미가 있게 살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삶의 환희가 숨겨져 있다. 나는 헛된 것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잡념들을 걷어내고, 내가 되어야할 내 자신에 몰입하고 있는가?

사진

<안나와 장님 토빗>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1606–1669)

유화, 1630, 63.8 cm x 47.7 cm

런던 국립 미술관

“성서 위경에 속한 <토빗서>에서 안나, 그의 남편 토빗, 그리고 아들 토비아스는 어려움에 처한다. 신이 그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토빗을 장님으로 만들면서, 이들의 신앙을 시험한다. 토빗은 장님이 되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깊은 명상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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