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국가의 기반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이란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다름’들이 수용하고 축하하여, 미래를 위해 기꺼이 ‘하나’가 되겠다는 조화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만일 그것이 자신의 의견보다 좋다면, 그것을 수용하는 용기다. 우리는 그런 용기를 아량이라고 부른다. 아량은, 자신의 마음속에 바다와 같은 광활한 마음을 소유해야 가능하다.
다름을 하나로 만들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 있다. 서양인들은 흔히 알렉산더 대왕을 떠올리겠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50-486년)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기원전 550년경,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파르티아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제국)의 세 번째 왕으로 기원전 522년부터 486년까지 36년 동안이나 치리하였다. 그의 선조 키루스가 유대인들을 해방하는 칙령을 내렸고, 다리우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국고를 털어 유대인들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2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지원하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테네와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쟁을 치룬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대왕은 제국에 필요한 경제구조, 도로망, 통화 등을 정비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다리우스에 관한 자료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존하였다. 페르시아에 관한 사료를,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그리스 역사가의 해석을 그대로 수용한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예다. 헤로도토스의 해석이 객관적 사실을 표방하고 있지만, 왜곡일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은 19세기부터 ‘오리엔트 르네상스’를 오리엔트의 사라진 언어들을 판독하고 이들의 사상을 재발견하기 시작하였다. 그 발견은 피렌체를 중심을 시작된 15세기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근본적인 시선의 변화를 가져왔다. 오리엔트는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인류 공통의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모체이기 때문이다.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천오백 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겨졌다. 1618년 G. S. 피구에로아Figueroa가 그리스-로마 저자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언급한 고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이 유적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보기에는 거의 유사하다.”
페르세폴리스에서 필사한 쐐기문자가 1657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집트의 성각문자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T. 하이드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cuneus “쐐기” + forma “모양”, 즉 쐐기모양 또는 쐐기문자)라 불렀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E. 캠퍼는 자기가 1686년에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C. 니부르Niebuhr는 페르세폴리스에 새겨진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 종류의 문자가 후에 언어학적으로 밝혀진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앞서 언급한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선생이었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상식과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고대 페르시아를 1802년에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 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단문보다는 장문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쐐기문자의 ‘로제타 석비’라고 할 수 있는 ‘베히스툰 비문’이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의 서쪽 비시툰산에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H. C. 로린슨(1810-1895)은 1826-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비시툰 지역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비시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하여 판독하였다.
기원전 521년 다리오 왕은 당시 알려진 모든 오리엔트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가 자손이 아니라, 왕위 찬탈자였다. BC 522년 페르시아 전체는 정치적인 혼란기였다. 고레스 대왕의 아들 캠비세스왕이 이집트 정벌에 나서자 페르시아는 내분에 휩싸였다. 캠비세스의 동생이라고 자칭한 가우마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이 소식을 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캠비세스가 시리아 부근에서 죽는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하면, 캠비세스가 말을 타다, 칼집이 실수로 벗겨지면서, 칼에 허벅지가 찔려, 그 상처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캠비세스가 사망한 소식이 알려지자, 페르시아 제국의 10개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 제국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가 바로 다리우스이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으며 캠비세스 왕과 함께 이집트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의 일만용사중 한명이었다. 다리우스는 고대 이란인들이 오래전부터 ‘거룩한 산’ 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산에 자기의 등극과정을 자세히 새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대 이란의 신은 아후라마즈다 신에게 비문을 헌사하여, 신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좌우로는 터키에서 인도, 상하로는 박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이란 중부 베히스툰 산 절벽에 새려놓았다. 베히스툰산은 이란 케르만자로부터 30km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베히스툰 산은 독립적인 산이 아니라 케르만자 지역을 감싸며 북쪽으로 계속되는 산맥 중의 일부이다. 하마단 쪽에서 보면 베히스툰 산은 평원에 갑자기 생겨난 500m 정도의 산이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베히스툰 비문‘이라 부른다. 다리우스가 이곳에 자신의 비문을 남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다리우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첫째로,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 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으로 쐐기문자를 정으로 새기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다. 이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가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군인이나 대상들이 다리우스 부조물과 비문들 보았을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에 의하면 이 산을 ‘바가스타나’로 불렀다. 바가스타나를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 즉, 이곳은 오래 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드릴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네 번째, 다리우스 대제가 그가 등극할 때 최고의 정적인 가우마타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이 베히스툰 산 근처이다. 다리우스에게 페르사아제국의 왕권을 가져다준 결정적인 사건인 가우마타 처단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이스툰 비문 안에서는 그 처단 장소를 ‘메데지방, 나사야 지바의 시카유바티’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지였다
비시툰 비문은 엘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삼중 쐐기문자 문헌이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 왕들이 남긴 비문들 중 가장 길며 역사학적으로 문헌학적으로 가장 중요한다. 베히스툰 비문은 서양인들이 쐐기문자를 판독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연결하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중요한 무역 로에 위치하여, 이 길을 따라가는 대상무역상들은 지상으로부터 60m 높이 높은 절벽위에서 새겨진 다리우스의 부조물과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산에 다리우스는 자기가 왕으로 등극한 과정을 쐐기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다. 베히스툰 산의 중턱에 이 비문과 부조물이 있다. 지상으로부터 69m 위의 경사면에 가로 18m, 세로 7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워낙 험한 곳이라 사람이 이를 보려면 고작 40m 정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1839년 영국 학자 헨리 로린슨은 베히스툰산 정상에서 자일을 이용해 내려와 공중에서 매달려 쐐기문자를 일일이 베꼈다고 한다. 이 비문과 부조물이 2천5백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난공불락의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비문의 상단 중심에 부조물이 있는 데, 실물 크기(1백73㎝)인 다리우스 대왕과 두 신하인 인타파르나스와 고르바야스, 다리우스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왕을 새겼다. 이 부조물 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강복하고 있다. 이 부조물들의 위아래로는 반란군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은 설명문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의 오른편으로는 다리우스 왕의 등극과정을 새긴 엘람어 비문이 손상된 채 있고, 왼편으로는 같은 내용이 아카드어로 적혀있다. 밑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다. 당초 다리우스왕도 ‘왕위 찬탈자’ 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업적으로 결국 고레스가 창건한 페르시아 제국을 완성하는 왕이 되었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을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전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그으 부조상과 그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에서 발견되는 룰루비의 왕 아누바니니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사실 이것은, 파르티아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이러스와 캠비시스처럼 아케미니드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다리우스 왕이, 이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로부터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맷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 비문에서 다리오 왕은 2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브리야스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페르네스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우스 대제는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했다.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우스 왕을 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은 그의 부조물과 비문들을 이 성스러운 산에 새겼다. 다리우스 왕의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되어 새겨지게 되었고, 같은 내용이 당시의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 제국의 각각 속국에 보내지게 되었다.
다리우스왕은 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다. 아마도 조선의 세종대왕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 유일한 왕이다. 그는 당시 학자들을 동원하여 쐐기문자로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다리우스 왕이 제위 할 때 창제된 문자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의 비문들에만 쓰이다 사라졌다.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문서에는 당시 고대근동에 널리 쓰이던 전통적인 문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들 간의 원활 한 통신을 위해서 이란어가 아닌 셈어인 아람어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했다. 아람어는 이미 레반트, 이집트, 동부 이란지역에 통용되고 있었다. 아람어 알파벳은 엘람어나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페르시아 제국의 엘람어는 당시 행정수도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정-경제문서에 사용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 사용된 다른 언어는 아카드어다. 아카드어는 지난 천년이상 고대 오리엔트의 외교문자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처음부터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대근동의 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다언어 비문이 예외가 아니라 정상이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원동력은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한 키루스의 다종교주의와 다문화주의, 그리고 다리우스가 표방한 다언어주의였다.
사진
<비시툰 비문>
왼편에서 세 번째 가장 큰 부조물이 다리우스 대왕이고 그 앞에 반란군들이 포승줄로 묶여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양쪽 날개를 펴고 다리우스를 강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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