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7(火曜日) “아름다움”
한 지인이 지나가는 말로 경기 가평군 조종면에 있는 조용한 식당을 알려주었다. 그는 다른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한번 가보세요’라고만 말했다. 평상시 그의 언행言行에 비추어, 나는 그곳이 가볼만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그가 장소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상호가 이상하여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가평군 상면에 위치한 ‘아침고요수목원’에 산책하러 가는 김에, 그 식당에 들렀다. 집에서 30분정도 운전하여 마침내 식당에 도착하였다. 가정집을 개조한 것 같은데, 건물이 이국적이다. 아치형 기둥, 붉은 색 지붕, 활짝 열린 창문은 지중해 그리스 시골집과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조르바와는 달리 미소를 머금은 인자하신 주인이 우리를 반긴다. 구석자리에 앉으니 지중해 여러 지역에서 가져온 기념품들이 장식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장식장 맨 위에는 유대인들의 의례 촛대인 ‘메노라Menorah’ 두 대가 진열되어 있고, 맨 아래 장에는 보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는 뱀이 감긴 모세의 지팡이가 그려진 접시가 세워져있다. 지팡이 양쪽으로 ‘물고기’란 의미이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표시한 ‘익스수’와 ‘구원자’를 의미하는 ‘소테르’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이 식당주인은 그리스에서 오랫동안 유학했던 고전학자이거나 신학자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내 입에 아직 달라붙지 않은 레스토랑이름은 ‘깔로 께리’다. ‘깔로’kalo는 분명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조화로운; 편안한’이란 의미의 ‘칼로스’kalos에서 유래했을 것이고 ‘케리’는 ‘딱 알맞은 시간; 신이 개입한 절묘한 기회’라는 의미의 ‘카이로스’kairos일 것이다. 합성한 현대 그리스어 발음일 것이다. ‘칼로 케리’Kalokairi는 메릴 스트립과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출현한 영화 <맘마 미아>의 배경이 된 섬, ‘스코펠로스’Skopelos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스어에서 ‘깔로 께리’는 ‘여름’이란 의미도 있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나아가 영적으로 최적의 순간을 알아차려 만끽하는 시간과 장소를 의미한다. 이 범상치 않은 이름만큼 그리스식 음식과 커피도 남달랐다. 요즘 들어 마주한 가장 훌륭한 음식이었다.
주인은 누가 보아도 잘생긴 길쭉한 대추방울토마토가 듬북 담긴 접시를 가져왔다. 마당 텃밭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이 토마토가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겸손한지! 식당에 가서 음식에 카메라를 갖다 대는 사람들을 혐오해왔는데,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갈색 냅킨 위에 토마토 알 하나를 올려놓고 아이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표면에 어디 울퉁불퉁한 것이 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미끈하다. 원래 잎이 달린 왼쪽을 다물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절제하였다. 오른쪽 끝에 뾰족한 도출은 자신이 더 이상 밖으로 외도하지 않겠다는 토마토의 의지다.
이 토마토의 자기절제와 자기신뢰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가 ‘칼로스’다. ‘칼로스’란 형용사의 명사형 ‘칼론’kalon은 단순히 외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완벽한 지고의 추상抽象이다. ‘칼론’은 고전 히브리어 ‘토브’țôb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신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한 단어 ‘토브’로 표현하였다. ‘토브’는 내적으로 완벽하여 자연스럽게 외적으로도 완벽한 상태로 ‘향기로운;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이란 뜻이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자신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들’을 기록한 <명상록> IV.20에서 ‘칼론’ 즉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Πᾶν τὸ καὶ ὁπωσοῦν καλὸν ἐξ ἑαυτοῦ καλόν ἐστι
καὶ ἐφ̓ ἑαυτὸ καταλήγει,
“어쨌든 아름다운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로 끝납니다.“
아름다움은 남의 인정과 칭찬에 경도되어 인생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찾아 올곧이 가지 않고, 이리저리 부초처럼 헤매는 대부분의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풀 한포기, 초연한 꽃 한송이, 의연히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잡은 나무, 누가 오물을 투척해도 언제나 유구하게 흐르는 강물, 우주가 창조될 때 그 뿌리를 지구 핵에 심어 놓은 육중한 산, 언제나 즐거워 창공을 나르는 새, 언제 촬영해도 베스트 샷이 나오는 반려견과 반려묘. 이들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유전자가 아름다움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발견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으로부터’(ἐξ ἑαυτοῦ) 발굴해 낸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는 인간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οὐκ ἔχον μέρος ἑαυτοῦ τὸν ἔπαινον:
οὔτε γοῦν χεῖρον ἣ κρεῖττον γίνεται τὸ ἐπαινούμενον.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 자체의 일부로 타인의 칭찬이나 인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여튼, 타인의 칭찬이 그것을 열등하게 만들거나 월등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광고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들의 유전자에는 ‘칭찬이나 인정’(에파이논; ἔπαινον)을 기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간만이 무대를 만들어 자화자찬하고 미인대회나 육체미대회를 만들어, 타인의 인정에 안달하고 목숨을 건다. 누가 나무를 칭찬한다고 해서, 나무가 더 근사해 지거나 늠름해 지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외부의 판단에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다.
τοῦτό φημι καὶ ἐπὶ τῶν κοινότερον καλῶν λεγομένων,
οἷον ἐπὶ τῶν ὑλικῶν καὶ ἐπὶ τῶν τεχνικῶν κατασκευασμάτων
“이 말은 심지어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관해 적용됩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들에 관해서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준비된 것들 포함합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추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제품과 고도의 기술을 가미하여 준비한 것들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τὸ γὰρ δὴ ὄντως καλὸν τίνος χρείαν ἔχει;
οὐ μᾶλλον ἣ νόμος, οὐ μᾶλλον ἣ ἀλήθεια, οὐ μᾶλλον ἢ εὔνοια ἢ αἰδώς᾿:
그러나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어떤 부족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법, 진리, 친절 그리고 경외는 자신 이외에 다른 것들 원하지 않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진실로 아름다운 것’(토 온토스 칼론 τὸ ὄντως καλὸν)는 그것 자체로 완벽해서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외부에서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진실로 아름다운 것들을 나열한다.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비추어 지켜야하는 도덕과 그 도덕을 명문화한 ‘법法’(노모스, νόμος),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지만 폐기하고 싶어도 폐기할 수 없고 잊혀 질 수 없는 ‘진리眞理’(알레쎄아아, ἀλήθεια), 그 진리가 자신의 밖을 표출되어 타인을 자신처럼 혹은 타인은 신처럼 대하는 ‘친절親切’(유노이아, εὔνοια), 그리고 자신이 오감으로 감지한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대한 ‘감탄’感歎과 ‘경외’敬畏(아이도스, ἰδώς)다.
τί τούτων διὰ τὸ ἐπαινεῖσθαι καλόν ἐστιν ἢ ψεγόμενον φθείρεται;
“이것들 중 어느 것이 칭찬을 통해 아름다움을 생기게 만듭니까? 혹은 비난 때문에 파괴됩니까?”
아우렐리우스는 우리에 묻는다. 이것들 중 어느 것이 나의 칭찬 때문에 아름답고 나의 비난 때문에 추한가? 인터넷을 통한 일방적인 의혹제기와 그것에 경도되어 편을 갈러 소모적인 싸움을 일삼는 대부분의 인간은 추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불행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인 괴물이다.
σμαράγδιον γὰρ ἑαυτοῦ χεῖρον γίνεται, ἐὰν μὴ ἐπαινῆται;
τί δὲ χρυσός, ἐλέφας, πορφύρα, λύρα, μαχαίριον, ἀνθύλλιον, δενδρύφιον;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자체에서 열등한 것이 등장합니까?
금, 상아, 보라색, 수금, 단검, 꽃, 혹은 덤불은 어떻습니까?”
아우렐리우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오해를 다시 한 번 일상적인 물건들을 통해 설명한다. 내 손가락에 있는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는다고 더 빛나지도 않고 비난을 받는다고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금, 상아, 황제를 상징하는 황복의 색인 보라색, 수금, 단검, 꽃 혹은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덤불도 그것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답다.
나는 스스로에게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을 타인의 평가에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아름다움은 타인과 타동물에 대한 친절로 표현되는가? 나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지는가? ‘깔로 께리’에서 본 대추방울토마토와 주인장 미소가 생각난다. 오늘 나는 아름답게 살 것인가 아니면 추하게 살 것인가?
사진
<가평 조정면 그리스 레스토랑 ‘깔로 께리’ 텃밭에서 나온 방울 토마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