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4(土曜日) 매일묵상 “시인是認”

2020.7.4(土曜日) 매일묵상 “시인是認”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과거의 실수를 거울삼아 지금 이 시간에 변화된 언행을 수련하고 흠모하는 미래를 서서히 조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하기 위해서 다짐을 하지만, 자신의 배역을 망각하거나 소홀하게 여겨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서 본의가 아니게 상대방을 섭섭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은, 자신의 알게 모르게 저지른 실수를 떠올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이스라엘 현자가 <전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그가 생각하는 만큼의 인간이다. ‘생각’이란 히브리어 동사 ‘샤아르śāʿar’가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이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려고 애쓰는 자신을 응시하는 훈련이다. 그런 훈련을 견딘 자의 말과 행동은 다르다.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자신에게 진지하고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서 친절하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삶의 지혜다. 표정과 몸짓을 통해 드러나는 행동은 언제나 의연하고 겸허하다. 자신의 대사와 연기를 아는 최고의 배우처럼, 그의 행동은 단결하다.

자신을 오롯이 응시하는 훈련은 실수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나를 조금 전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인간에 대한 많은 정의들 중에, 인간의 속성과 가능성을 간략하게 간파한 문구가 있다. 로마의 정치가, 철학자, 그리고 비극작가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기원전 4년-기원후 65년)는 인간의 속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Errare humanum est,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입니다.

perseverare autem diabolicum,

그러나 실수를 지속하는 것은 악마적입니다.”

세네카의 말대로 실수하는 것은 누구나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자 속성이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돌아보고 수정하는 않는 나태나, 실수를 수정할 결심을 하지 않거나, 혹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악마적이다. ‘악마’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디아볼루스’diabolus와 그리스 단어 ‘디아볼로스’diabolos는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디아) 가지 말아야할 곳에 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됨의 일부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용기가 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공개적인 행위다. 그(녀)는 자신이 흠모하는 자기-자신에 비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을 인정하고 꾸짖는 자기성찰이다. 바로 ‘시인是認’이다. 영웅이 영웅인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숭고한 자신을 위해 정진하며, 그 과정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실수에 대한 인정과 시인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영웅인 다윗이 영웅인 이유는 많다. 그는 홍안의 소년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거인 골리앗의 목을 자르고, 12지파의 중지를 모아 예루살렘을 수도로 지정하였다. 그는 무명의 목동이었다가 이스라엘 왕이 된 이상적인 삶의 전형이다. 다윗은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슈퍼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영웅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흠이 있기 마련이다. 다윗은 삶의 정점에서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영웅이기에 맞이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터널이 있다.

다윗을 비극으로 인도한 매개체는 밧세바라는 여인이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 자신이 지닌 역동적이며 대립적인 성격들을 확인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지만 반항적이고 인간적이면서도 잔인하고 단순하고 계산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밧세바 사건을 통해 영웅만이 가진 치명적인 흠을 가장 잘 드러낸 비극적 인간이다. 밧세바 사건은 <사무엘기 하> 11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 다음 해 봄에, 왕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의 군인들을 맡겨서 출전시켰다. 그들은 암몬 사람을 무찌르고, 랍바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일생 동안 야전 사령관으로 명성을 쌓은 다윗은 들판에서 다른 부하들과 진을 치고 대치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느긋하고 한가롭게 지냈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자신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신이 거주하는 시온 성으로 만들고,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다윗은 자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이 일생 해오던 전략을 수정할 필요도 없기에 자신이 하던 일을 요압 장군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왕이 하는 일임에도 다윗은 궁궐에서 빈둥거리며 자신의 오른 팔인 요압을 전투에 내보낸다.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들을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는 피할 수 없는 마음 상태를 ‘휴브리스’, 즉 오만傲慢이다.

다윗은 왜 전쟁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렀을까? 당시 주변 국가인 암몬인들과 아람인들은 점점 세력을 키워가는 이스라엘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결탁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머문 이유에 대해 성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그는 전성기를 보내고 이제 황혼으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나이를 얼추 계산해보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요압 장군은 암몬의 수도 랍바 성을 기습 공격해 상수도와 그와 연결된 시냇가 도시 구역을 점령한다. 그런 뒤 그는 다윗에게 전령을 보내 이스라엘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의 중심부를 점령할 것을 요구한다. 충직한 요압 장군은 랍바 점령을 다윗의 공적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랍바로 가지 않았다.

성서 기자가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다윗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쇠퇴하고 있었다. 다윗왕은 일생을 사막의 모래 폭풍 속에서 뜨거운 낮과 추운 밤을 보냈다. 그는 사울과 블레셋, 그리고 가나안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전략적인 지혜와 강력한 체력으로 승리했고 그에 걸맞은 자기 존경심이 넘쳐났다. 그는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이 나체가 된 것조차 모르던 전형적인 남성이었다. 다윗이 이제는 활력을 잃고 궁궐에서 뒹굴며 부인과 수많은 첩과 함께 아이들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던 다윗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진 모습이다. 그의 자존심과 자기 존경심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다윗은 밧세바에게 한눈에 반한다. 다윗은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 빠져들어,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신하를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다. 신하는 그 여인이 히타이트(헷) 사람이며 이스라엘 군대 장교인 우리아의 아내라고 전했다. 밧세바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다윗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와 정을 통하였다. 밧세바는 다윗과 정을 통한 뒤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유대법에 의하면 여인이 간음을 하면 투석으로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남편이 이스라엘 군대의 고위 장교라면 더욱더 일이 꼬일 터였다. 밧세바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인 다윗에게 직접 알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대 사회의 다른 여인들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 항복하는 수동적인 희생자로 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 멀리 포석하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임신한 아이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밧세바는 과감하게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밧세바는 삶과 죽음의 위험한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선에서 전사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다윗은 우리의 상관인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이제 말과 행동이 거짓과 악으로 가득한 보잘 것 없는 파렴치범이 됐다. 밧세바는 남편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에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간 애도의 시간이 지나자 다윗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을 보내 밧세바를 다시 왕궁으로 들였다. 다윗은 이미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잃었고, 이스라엘 또한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악한 일이므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스라엘을 건국한 다윗이 이렇게 초라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는 없다. 그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성서 저자는 예언자 나단과 다윗의 만남 이야기를 <사무엘기 하> 12장에 삽입함으로써 다윗을 다시 괜찮은 왕으로 돌려놓고자 한다. <사무엘기 하> 12장을 보면 아무런 맥락 없이 예언자 나단이 등장한다. 나단은 후에 밧세바를 도와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만드는 인물이다. 나단이 다윗을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양떼나 소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단이 자신의 이야기를 빗대어 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나단은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을 책망한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꾸짖자, 다윗은 지체없이 나단에게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시인한다. 다윗이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남았던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용기다. 신약 시대에 예수는 “다윗의 자손, 예수”로 불렸다. 잘못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숭고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는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용기가 있는가?

사진

<다윗의 편지를 받고 상념에 잠긴 밧세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

유화, 1654, 142 cm x 14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