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9(水曜日) “집착執着”
파탄잘리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자극하고 발휘하기 공간과 시간인 삼매경로 진입하려는 길목에서, 그 수련자의 진입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 방해꾼을 <요가수트라> ‘훈련경’ 3행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삼매경 진입을 방해하는 방해꾼은 다음과 같다.
그것들은 무식, 이기심, 욕심, 혐오, 집착.”
무식(avidyā)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에서 자신의 임무를 모르는 불행이다.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모르기 때문에, 타인과의 경쟁에서 제로섬 게임을 하다 지쳐 인생을 마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부분은 무식하다. 무식은 수학공식이나 영어단어를 몰라서 생기는 고질병이 아니라,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배역을 모를 때 생기는 당혹감, 창피함이며 그 콤플렉스를 보완하기 위한 서투른 혹은 과도한 말투나 거친 행동이다. 글자를 모르거나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해 무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무식하다.
이기심(asmitā)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이나 불운을 남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나날들을 방탕하게 보내는 건방짐이다.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의 특징은 함께 지내기자 불편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에게 찾는다. 그리고 인생을 타인 음해와 신세한탄으로 허송 생활한다. 그런 사람들이 IT시대에 주로 하는 일이 의혹제기와 스스로가 보기에도 형편이 없는 무책임한 댓글달기다. 혹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상실하고,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다준 게으름에 중독되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욕심(rāga)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대로,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둔함이다.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생각, 그리고 정교한 생각으로 제련된 말과 행동이다. 자신이 조절 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한 적이 없어 타인의 인정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은 욕심꾸러기다.
혐오(dveșa)는 욕심의 반대다. 자신의 의식을 확장하지 못해 무식한 상태를 유지하고 결국 완고하게 된 사람의 특징이다.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장착한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다르다’라고 말하기 않고 ‘틀렸다’라고 정죄하고 호통치고 가르치려한다. 자신이 지닌 세상에 대한 견해, 특히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의견은 의견일 뿐 가변적이다. 좌파-우파는 그 기준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진 자-못가진자로 그렇다. 얼마의 돈을 지녀야 ‘가진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지닌 사람에겐, 가난뱅이다. 아무리 적게 가졌다 할지라도, 그(녀)보다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쉽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작당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내가 스스로 정하는 삶의 마지노선이다. 자신이 스스로 기준이 되어, 다른 기준을 지닌 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능력은 최고의 실력이다.
마지막으로 ‘집착’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훈련경’(사다나) 9행에서 ‘집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स्वरस्वाहि विदुषोऽपि समारूढोऽभिनिवेशः
sva-ras-vāhi viduṣo-'pi samārūḍho-'bhiniveśaḥ
‘스바라스바히 비두쇼-피 사마두로-비니베샤흐’
(직역)
“자신의 성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집착은
심지어 현자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완전히 정착된 것이다.”
(의역)
“삶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오래된 성향으로부터 저절로 흘러오는 것이다.
집착은 어리석은 사람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전생으로부터 부여받아 유전적으로 완전히 정착된 성향이다.”
‘집착’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아비니베샤’abhiniveśaḥ는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것에 안주하여 그것에 중독된 상태’다. ‘아비니베샤’는 ‘아비’abhi-, ‘니’ni-, ‘비슈’viś-의 합성어다. ‘집착’을 의미하는 ‘아비니베샤’의 첫 단어는 ‘아비’는 흔히 부사나 전치로 알려져 있다. 그 일반적인 의미는 ‘가까이’ 혹은 ‘를 향하여’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우주창조와 관계된 단어로, 리그베다 I.64에 처음 등장한다. ‘아비’는 우주에 등장한 ‘첫 빛줄기’라는 뜻이다. ‘아비’를 다시 어원분석하면 이렇다. ‘비’bhi는 ‘두려움’이란 의미이고 ‘아’a-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단어를 부정하는 접두사이기에, ‘아비’를 ‘두려움이 없는’이란 뜻이다. 아마도 고대 인도시인은 우주에 질서를 준 첫 빛줄기의 특징을 ‘두려움이 없다’라고 생각해, 이 단어를 조어한 것 같다. ‘니’ni-는 ‘가까이’라는 뜻이고 ‘비슈’viś-는 목초지를 따라 항상 이동하던 유목민들이 농업을 발견하여 한곳에 정착하여 거주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의미한다. ‘비슈’는 자신에게 경계를 넘어선 모험을 하지 않고 우연히 주어진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연명하는’ 삶의 모습이다.
‘아비니베샤’의 의미를 어원의 의미를 담아 풀어 해설하자면, “언제나 새롭게 빛을 비추는 자신의 양심의 빛을 겁도 없이 가리고,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세계를 유일하고 최고라고 착각하고, 그것에 안주하여, 자신의 오감을 지속적으로 자극하여 결국 그것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들에 매달리는 불쌍함‘이다. ’아비니베샤‘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인간이 지니는 ’죽음‘에 대한 고질적인 근심이며, 그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자,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영원히 살겠다는 삶에 대한 애착이다.
‘집착’은 ‘욕심’과 ‘혐오’의 조장하는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은 고질적인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유전자다. 집착은 내 몸, 숨, 마음, 말, 얼굴 표정, 몸짓, 손짓, 걸음 거리, 말하는 태도, 눈빛에 영향을 준다. 내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좌정하고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단속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임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결심한다. 만일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은 그 집착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 집착은 너무 강력하여 심지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생을 수련한 ‘구루’도 벗어날 수 없고 심지어 무릎을 꿇게 만든다. 나는 집착이라는 중앙제어장치가 제어하는 노예인가? 아니면 집착을 응시하고 벗어나 새로운 나를 구가하는 자유로운 인간인가?
사진
<멀리 망을 보는 인디언 척후병>
미국 인상주의 화가 줄이언 온더돈크Julian Onderdonk (1882–1922)
유화,15.2 cm x 22.9 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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