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4(金曜日) “요나콤플렉스”

2020.7.24(金曜日) “요나콤플렉스”

인간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인류가 자기이해를 위해 구축해 온 철학, 종교, 문학, 그리고 예술을 생존하게 만드는 중요한 외침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불가지론 신학자 피스토리우스는 데미안이 부재하는 동안 에밀 싱클레어에게 명상과 꿈의 해석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수련시킨다. 그는 에밀에게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행은 인간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욕망이다. 누구나 그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권력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감정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욕망 자체를 두려워한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인간은 하늘을 날게 만드는 자신의 날개를 벗어 버리고, 땅에 붙어 걷기를 선호하며 남들이 만들이 놓은 법에 복종한다.”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조각해야하는 위대한 영웅, 즉 자기-자신을 지니고 있다. 이 자기-자신은 각자 인간에게 최선의 가능성이다.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무함마드와 같은 소수의 인간만이 그것을 발굴하여 자신과 주위사람들에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열망하는 그 위대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오토 랑크Otto Rank(1884-1939)는 <예술과 예술가>라는 책에서 인간에겐 두 가지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fear of death’이며 다른 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공포fear of life’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단순히 육체의 늙음과 사라짐에 관한 두려움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규범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점점 잃는다. 순응하며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두려움으로, 자신을 유일하면서도 독창적인 인간으로 변모하기 위해, 스스로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개조한다.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익지스트’exist의 어원적 의미는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탈출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도하다’다.

‘익지스트’를 시도하는 사람의 친구는 외로움과 소위이다. 인간은 더욱더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개인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는 점점 대중의 보호를 잃게 된다. 대중은 자신의 아픔을 달래주고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열광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또한 자신이 영웅으로 만든 사람을 얼마지나지 않아 악당으로 만들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대중’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독창적인 자신을 구가하는 사람들로 점차로 자신의 외로움을 몰입沒入과 고독孤獨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다시 대중의 일부로서 사는 것이 편하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오토 랑크는 우리 대부분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순응이 미덕인 사회의 규범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하늘로 치솟게 만들, 피스토리우스가 말하는 날개를 스스로 잘라버린다고 말한다. 랑크는 이 두려움을 ‘살아 있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정의하였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살아 있음에 대한 두려움’ 라는 소용돌이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영원히 헤매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여 감히 ‘다르게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위대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복종하고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별다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대중문화는 스크린이나 미디어에 등장한 특정한 인물을 영웅으로 숭배하고 대중은 그(녀)를 숭배하는 자로 전락시켰다.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익명의 하찮은 존재로 사는 것을 묵인하고 만족한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1909-1970년)는 위대함에 대한 두려움을 ‘요나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 요나는 신에 맡긴 운명적인 임무를 두려워 도망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다. <요나서>는 느닷없이 시작한다. 요나가 누구인지 설명하지도 않는다. 신이 갑자기 요나에게 말한다.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야훼의 말이 아미때의 아들 요나에게 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꾸물대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

앗시리아 제국의 가장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내 코끝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요나> I.1-2

성서기자는 요나가 누구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를 ‘아미때의 아들’이라고만 소개한다. 아미태의 이름이 성서에서 두 번, 요나의 아버지로만 언급된다.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대 갓헤벨이란 마을 출신이다. 갓헤벨은 예로부터 포도재배로 유명한 지역이다. 아마도 요나는 아버지 아미때를 도와 시골 한적한 곳에서 포도를 재배하며 연명하던 농부였을 것이다.

신은 요나가 명상을 하고 덕을 쌓아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신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인 요나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현 듯 선택하였다. 요나는 시골산지에서 포도주를 만들고 하루하루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런 자에게 신이 갑자기 말을 건다. 요나가 포도원이 한눈에 보이는 산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에게 행복은 가족들과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다.

신이 요나에게 건 낸 첫 번째 말은 ‘자, 꾸물대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다. 히브리 단어 ‘쿰’qûm은 히브리 문장 구문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쿰’의 축자적인 의미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라’이다. 인간이 한 장소에 안주하면, 그 장소가 편해져 좀처럼 이주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편함이 일상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쿰’은 그런 안주하는 장소로부터 엉덩이를 떼어내고 미지의 장소로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담긴 어휘다. ‘쿰’은 또한 다른 동사 앞에 등장하여, 그 동사의 의미를 강화하고 촉구한다. 위 문장에서 신은 니느웨란 도시로 ‘가라’고 명령한다. ‘가다’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할락’hālāq은 동작동사로 “자신이 안주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박차고 첫 발을 내 딛어라”란 뜻이다.

신은 항상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만을 명령한다. 그(녀)를 실험하고 싶어서다. 그의 한계를 측정하여, 일을 맡기고 싶어서다. 신은 요나에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라고 말한다. 성서저자는 ‘니느웨’를 수식한 문구하나를 붙였다, ‘그 큰 도시’다. 이 문구는 성서에 한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표현으로, 성서저자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라는 뜻이다. 신은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무명의 촌부에게 갑자기 나타나, 앗시리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한다.

신은 요나에게 그가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니느웨 도시와 앗시리아 제국 사람들의 죄를 많이 짓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요나와 니느웨 거주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일 신이 요나에게 북 이스라엘 도시 사마리아나 베델에 가서, 신의 말을 전하라고 명령한다면, 요나가 순응할 수도 있다. 신은 요나에게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앗시리아 제국의 안녕을 위해 신의 말을 선포하라고 명령한다.

위대한 일은 비상식적이다. 요나의 반응은 예상할 만하다. 요나는 그 즉시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니느웨와 정반대의 장소인 ‘타르시스’로 도망치려한다. 아마도 그가 포도주 수출을 위해 외국선원으로부터 소문으로 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타르시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항구 혹은 스페인의 ‘타르테소스’항구라고 추정한다. 요나의 너무 인간적인 행위는 <요나서> 1.3에 다름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이 말을 받고도 요나는 야훼의 눈앞을 벗어나 타르시스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항구 욥바로 내려갔다. 거기서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배 삯을 내고 남들과 함께 배에 탔다. 야훼의 눈앞을 벗어날 셈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될 수 있는 자기-자신을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겠다는 열망이다. 그런 자기-자신의 성장을 가로 막는 것 또한 과거에 안주하려는 자기-자신이다. 요가는 시골산지에 무명씨로 인생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양심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경청할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미세한 소리가 너무 강력하여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자신의 생계를 보장시켜줄 타르시스로 갈 참이다. 욥바라는 항구로 내려가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의 양심에 호소하는 신의 침묵의 소리에 귀를 닫을 것인가? 아니면 그런 명령이 두려워, 더 안전하고 은밀한 장소로 가기 위해 숨을 것인가?

사진


<얄타해의 노을>

러시아 크리미아 반도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1817-1900)

유화, 67cm x 89cm’

개인소장